세계에 단 두 곳뿐인 ‘종자 금고’… 그중 하나가 경북 봉화에 있다
2015년 9월, 노르웨이 스피츠베르겐섬 영구동토층 아래에 자리한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의 문이 예정에 없이 열렸다. 종자를 넣기 위해서가 아니라, 꺼내기 위해서였다.
시리아 알레포에 본부를 두고 있던 국제건조지역농업연구센터(ICARDA) 때문이었다. 내전으로 본부를 철수하면서,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밀·보리·렌틸·병아리콩 원종을 모아 온 14만여 자원 규모의 컬렉션이 기능을 멈췄다. 종자가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전쟁터 한복판에서는 씨앗을 다시 심어 증식할 수도, 연구자에게 분양할 수도 없었다. 살아 있으나 쓸 수 없는 상태였다.
ICARDA는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스발바르에 11만 6,484점을 중복 저장해 둔 상태였다. 1차로 3만 8,073자원을 인출해 레바논 터볼과 모로코 라바트의 새 거점으로 보냈고, 그해 11월 곧바로 파종했다. 2017년 2차 인출이 이어졌고, 2019년 8월 마지막 물량까지 반출되면서 알레포에서 맡긴 종자는 전량 회수됐다.
인출된 종자는 발아에 성공했다. 증식된 새 종자는 다시 스발바르로 돌아왔고, 2017년 이후 재입고된 자원만 4만 2,729점에 이른다.
ICARDA는 스발바르 개관 이래 인출을 요청한 유일한 기탁기관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시설이 왜 존재하는지를 실제로 증명한 유일한 사례이기도 하다.

시드볼트와 시드뱅크는 다르다
씨앗을 보관하는 시설은 흔히 ‘종자은행’으로 뭉뚱그려 불리지만, 국제적으로는 성격이 뚜렷이 갈린다.
시드뱅크(Seed Bank·종자은행) 는 도서관에 가깝다. 종자를 수집해 보관하되, 연구·육종·복원 목적으로 수시로 꺼내 분양한다. 발아율이 떨어지면 다시 심어 증식(regeneration)한 뒤 재입고한다. 국제식량농업기구(FAO) 집계 기준 전 세계에 1,750여 곳이 있으며, 이 중 1만 자원 이상을 보유한 대형 기관은 130곳 안팎이다. 전체 보존 자원은 740만여 점으로 추산되나, 중복을 걸러 낸 고유 자원은 4분의 1 남짓에 그친다는 분석도 있다.
시드볼트(Seed Vault·종자저장고) 는 은행 금고에 가깝다. 대재난에 대비한 최후의 보험이므로, 원칙적으로 꺼내지 않는다. 소유권도 저장고가 아니라 기탁기관에 그대로 남는다. 저장고는 장소와 환경만 제공할 뿐 종자를 분양하지 않는다.
시드볼트에 들어간 씨앗의 가장 좋은 결말은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도록 그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시리아 사례가 예외적으로 회자되는 이유다.
| 구분 | 시드뱅크 | 시드볼트 |
|---|---|---|
| 목적 | 연구·육종·복원을 위한 활용 | 대재난 대비 영구 보존 |
| 입출고 | 수시 분양·증식·재입고 | 원칙적으로 인출 없음 |
| 소유권 | 대체로 보관기관이 관리 | 기탁기관에 그대로 귀속 |
| 보관 방식 | 개별 관리, 정기 발아검정 | 블랙박스(밀봉 상태 그대로) |
| 세계 규모 | 1,750여 곳(FAO) | 사실상 2곳 |
세계에 단 두 곳, 그중 하나가 한국
글로벌 시드볼트로 인정받는 시설은 전 세계에 두 곳뿐이다. 작물 종자를 맡는 노르웨이 스발바르, 그리고 야생식물 종자를 맡는 경북 봉화의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다. 두 곳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역할 분담 관계에 가깝다.
스발바르의 목표는 식량안보다. 2008년 개관 이후 2026년 6월 70번째 입고를 마치며 누적 140만 1,285점을 넘어섰다. 기탁기관 132곳, 6,500여 종 규모다. 노르웨이 정부와 북유럽유전자원센터(NordGen), 국제작물다양성재단(Crop Trust)이 공동 운영하며, 기탁은 전액 무상이다. 최근에는 부르키나파소와 니제르가 국제식물유전자원조약 이익공유기금의 지원을 받아 첫 기탁국으로 합류했다.
백두대간의 목표는 생물다양성이다. 야생식물 종자 영구저장시설로는 세계 최초다.(설립 시점은 자료에 따라 2015년과 2018년이 혼용되는데, 시설 조성은 2015년, 국제 종자 수탁 본격 운영은 2018년 이후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시설 스펙은 그 자체로 서사가 있다. 해발 600m 지점의 지하 46m 터널형 구조로, 강화 콘크리트 60cm와 3중 철판을 둘러 규모 6.9 지진을 견디도록 설계됐다. 365일 24시간 영하 20도·습도 40%를 유지하며, 정전 시에도 내부 온도가 영상 10~15도 이상으로 오르지 않는다. 2019년부터는 ‘다’급 국가보안시설로 지정돼 지하 구역 출입이 통제되고 GPS에도 위치가 잡히지 않는다.
보유량은 꾸준히 늘고 있다. 2022년 12월 5,424종 19만 2,625점이던 것이 2024년 말 5,900여 종 28만여 점으로, 최근 집계로는 6,028종 28만 908점까지 확대됐다. 수집지는 중앙아시아를 포함해 190개국에 이른다. 2050년까지 전 세계 야생식물종의 30% 이상을 보전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상징해 5월 30일을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의 날’로 지정했다. 저장 용량은 종자 200만 점 규모이며, 포화에 대비해 터널 2개를 추가 굴착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기탁 종자는 무상으로 영구 보존된다.
기탁기관 명단도 흥미롭다. 가장 많은 종자를 맡긴 곳은 국립농업과학원이지만, 대학·종묘회사·수목원·연구소 외에 동강할미꽃보존회, 유한킴벌리, 국가유산청(천연기념물 종자), 포스코, 하동녹차연구소, 용산구청, 그리고 개인 기탁자까지 이름을 올렸다.
블랙박스 저장시스템 도입 이후로는 기탁기관이 밀봉한 상자를 개봉하지 않고 그대로 저장한다. 종자 유출을 막고 내구성을 확보하기 위해 규격화된 방식으로, 저장고 측조차 내용물을 열어 보지 않는다.
다만 ‘영구 보존’이 절대적 봉인을 뜻하지는 않는다. 시드볼트 측은 특정 지역에만 자생하는 식물이 산불 등으로 완전히 소실될 경우, 복원을 위해 저장 종자를 반출해 제공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시드볼트는 봉인이 아니라 보험이다.
국제화도 진행 중이다. 운영기관인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은 국제식물원보전연맹(BGCI)과 3년 일정의 ‘국제 식물종자 중복보전 사업’을 추진해 1차로 20개 기관을 선정했다. 52개 기관이 신청해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적색목록 등을 기준으로 추려졌으며, 참여국은 아프리카 6개국, 남미·유럽 각 5개국, 아시아·북미 각 1개국 등 18개국이다. 기존 아시아 위주 기탁 구조에서 벗어난 첫 사례다.

한국은 이미 세계 5위 종자 강국이다
시드볼트 이야기에 가려져 있지만, 한국의 시드뱅크 역량은 국제적으로 상위권이다.
전북 전주의 국립농업유전자원센터는 1987년 농촌진흥청 종자은행으로 출발해 2008년 국제규격 저장시설을 갖췄다. 2023년 1월 기준 세계 최다 유전자원 보유국은 미국(60만 자원 이상)이고, 인도(약 46만), 중국(약 44만), 러시아(약 31만)가 뒤를 잇는다. 한국은 약 27만 자원으로 세계 5위다. 국제기구로부터 세계종자보존소(World Seed Vault) 지위를 인정받아 11개국의 2만 자원을 대신 보관해 주고 있기도 하다.
보존 기술 스펙도 구체적이다. 중기저장고는 4℃에서 30년, 장기저장고는 영하 20℃에서 100년 보존이 가능하다. 씨앗 형태로 보존이 어려운 마늘·사과 등 영양번식 작물 7종 1,558자원은 영하 196℃ 액체질소를 이용한 초저온 동결보존으로 관리한다. 전주·수원 종자은행 건물은 리히터 규모 7의 지진을 견디도록 지어졌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4중복 보존 체계다. 조선왕조실록을 4대 사고에 나눠 보관했던 방식과 같은 발상으로, 전주와 수원 종자은행, 봉화 백두대간 시드볼트에 3중으로 보존하고, 여기에 노르웨이 스발바르에 토종자원 2만 3,000여 자원을 블랙박스로 추가 기탁했다. 한 곳이 무너져도 나머지가 남는 구조다.

씨앗은 과학이 아니라 외교의 문제다
각국이 종자 확보에 뛰어드는 이유는 낭만이 아니다. 기후위기와 개발로 종 다양성이 줄어들면서, 유전자원은 곧 산업 자원이 됐다.
나고야의정서 체제에서 유전자원을 제공받아 이윤을 창출한 쪽은 제공국에 이익을 공유해야 한다. 벼·보리·밀·고구마·감자·바나나 등 인간과 가축의 주요 식량 64개 작물은 식량농업식물유전자원국제조약(ITPGRFA)의 다자체계로 예외 처리되지만, 그 바깥의 자원을 두고는 각국 입장이 첨예하게 갈린다.
국립농업유전자원센터가 스스로의 임무를 “우리나라 고유 유전자원의 자원주권 확보”와 “동북아 유전자원 허브뱅크 역할 수행”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이 맥락이다. 씨앗은 생물학의 대상이자, 지식재산권과 통상의 대상이다.
지하 46m에 묻힌 씨앗들은 언젠가 꺼내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꺼내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며 넣어 둔 것이다. 다만 그 금고를 짓고, 온도를 지키고, 발아율을 검정하고, 국제 협약 테이블에 앉는 일은 누군가가 매일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무엇을 공부한 이들일까. 다음 편에서 종자 보전이라는 분야의 학문 지도와 진학 경로를 살펴본다.
(② 씨앗을 지키는 사람들은 무엇을 전공했을까 — 종자과학부터 큐 왕립식물원 석사까지 로 이어집니다)
참고자료
- 카이스트신문, 「백두대간에 위치한 현대판 노아의 방주, 시드볼트」, 2023.09.04. https://times.kaist.ac.kr/news/articleView.html?idxno=21389
- 서울경제 시그널, 「[열린송현] 지구 미래 지키는 보루, 백두대간 시드볼트」. https://signalm.sedaily.com/NewsView/2GSRQ1HLDP/GG03
- 서울경제,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 전세계 식물종자 저장 대폭 확대」, 2025.09.22. https://www.sedaily.com/NewsView/2GY02FUU2Z
- 헤럴드경제,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 3년 연속 기증종자 저장」, 2024.12.05. https://biz.heraldcorp.com/article/10009409
- 팍스경제TV,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 베트남 야생식물종자의 안전한 보전 위한 ‘첫발’」. https://www.paxetv.com/news/articleView.html?idxno=197629
- 서울특별시, 「서울식물원, 식물종자 500점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시드볼트’에 기탁」, 2023.11.02. https://news.seoul.go.kr/env/archives/510894
- Crop Trust, “Svalbard Global Seed Vault Crosses Major Milestone – 1.4 Million Seed Samples Secured”, 2026.06.17. https://www.croptrust.org/news-events/news/svalbard-global-seed-vault-crosses-major-milestone-14-million-seed-samples-secured
- Svalbard Global Seed Vault 공식 홈페이지. https://www.seedvault.no/
- Norwegian Ministry of Agriculture and Food, “Svalbard Global Seed Vault Crosses Major Milestone”, 2026.06.17. https://www.regjeringen.no/en/whats-new/svalbard-global-seed-vault-crosses-major-milestone-1.4-million-seed-samples-secured/id3166080/
- 헬로디디, 「”세계 5위 식물유전자원 보유국, 바이오 소재 종자 클러스터로 미래 동력 주도”」, 2023.05.25. https://www.hellodd.com/news/articleView.html?idxno=100643
- 농촌진흥청 웹진, 「농업유전자원을 수집·보존하는 일은 생명을 지키는 일」. https://www.rda.go.kr/webzine/2021/01/sub1-5.html
- 농촌진흥청 농업유전자원센터(씨앗은행). https://genebank.rda.go.kr/
-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유전자원센터 기관소개. https://www.naas.go.kr/04_intro/Intro_Greeting.do?menu_code=4&tg=1&mmode=320
- Svalbard Global Seed Vault, “Withdrawal of ICARDA Aleppo seeds accomplished”, 2019.09.11. https://www.seedvault.no/2019/09/11/withdrawal-of-icarda-aleppo-seeds-accomplished/
- Svalbard Global Seed Vault, “ICARDA seeds safe back in Lebanon and Morocco”, 2017.10.27. https://www.seedvault.no/2017/10/27/icarda-seeds-safe-back-in-lebanon-and-morocco/
- ICARDA, “ICARDA deposits vital seeds in Svalbard Vault”. https://icarda.org/media/press-release/icarda-deposits-vital-seeds-svalbard-vault-securing-food-generations-come
- CNN, “Arctic ‘Doomsday Vault’ opens to retrieve vital seeds for Syria”, 2015.10.19. https://www.cnn.com/2015/10/19/europe/svalbard-global-seed-vault-syria
- Asdal, Å. & Guarino, L., “The Svalbard Global Seed Vault: 10 Years—1 Million Samples”, Biopreservation and Biobanking, 2018.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6204558/
- Fu, Y.-B., “The Vulnerability of Plant Genetic Resources Conserved Ex Situ”, Crop Science, 2017. https://acsess.onlinelibrary.wiley.com/doi/full/10.2135/cropsci2017.01.0014
- 한국경제 경제용어사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시드볼트」. https://dic.hankyung.com/economy/view/?seq=16222
- Landscape Times,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시드볼트 종자 10선 선정」, 2020.01.02. https://www.la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34166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공감), 「지구 대재앙 때 꽃피울 ‘생명의 씨앗’」, 2022.04.25. https://gonggam.korea.kr/newsContentView.es?mid=a10207000000&news_id=EBC6D4014C404203E0540021F662AC5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