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수만 자의 한자 대신 단 28자로 백성의 말을 적게 했다. 그 숫자는 서문에 직접 적혀 있다.
“내 이를 위하여 어엿비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쉬이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1446년 반포된 『훈민정음』 서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어엿비 여기다’는 ‘불쌍히 여기다’라는 뜻이다. 글자를 만든 이유가 지식인의 학문이 아니라 백성의 불편이었다는 선언이다.
한글은 초성 17자와 중성 11자, 모두 28자로 출발했다. 오늘날 쓰는 24자보다 4자가 많았다. 580년이 지난 지금, 이 28자의 설계에 담긴 세종의 마음을 다시 짚어 본다.
말은 있는데 글이 없던 백성
조선 백성은 우리말로 말했지만, 글은 중국 글자인 한자로 써야 했다. 말과 글이 따로 놀았다. 서문 첫 문장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가 바로 이 문제를 짚는다.
한자는 글자 하나가 뜻 하나를 가진다. 일상 문서를 읽으려면 수천 자를 익혀야 했다. 생업에 매인 농민이나 노비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관청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서문은 적고 있다.
신라 때부터 쓰인 이두와 구결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한자를 빌려 쓰는 방식이었다. 한자를 모르면 쓸 수 없다는 한계는 그대로였다.
28자는 ‘외울 것’을 최소로 줄인 설계다
28자는 28개를 따로 외우는 체계가 아니다. 기본자 몇 개만 알면 나머지가 저절로 풀리도록 설계됐다.
자음: 발음기관을 본뜨고 획을 더했다. 자음 기본자 5자는 소리 낼 때 혀와 입의 모양을 그대로 그렸다. 소리가 세지면 획을 하나씩 더했다.
| 기본자 | 본뜬 모양 | 획을 더한 글자 |
|---|---|---|
| ㄱ |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 ㅋ |
| ㄴ |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모양 | ㄷ, ㅌ |
| ㅁ | 입 모양 | ㅂ, ㅍ |
| ㅅ | 이 모양 | ㅈ, ㅊ |
| ㅇ | 목구멍 모양 | ㆆ, ㅎ |
모음: 하늘·땅·사람 세 획으로 만들었다. 둥근 하늘(ㆍ), 평평한 땅(ㅡ), 서 있는 사람(ㅣ)을 조합해 ㅗ, ㅏ, ㅜ, ㅓ 등 11자를 만들었다.
받침: 새 글자를 만들지 않았다. 해례본은 “종성은 초성을 다시 쓴다”고 정했다. 끝소리용 글자를 따로 두지 않아 외울 양이 그만큼 줄었다.
이 글자들을 초성·중성·종성으로 모아 쓰면 수천 개의 음절이 나온다. 해례본은 이 28자로 바람 소리, 학 울음,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까지 적을 수 있다고 자부했다. 정인지는 해례본 서문에 “슬기로운 이는 아침나절이 끝나기 전에,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고 썼다.
그중 ㆍ(아래아), ㆁ(옛이응), ㆆ(여린히읗), ㅿ(반치음) 4자는 소리 변화와 함께 쓰임이 사라졌다.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이후 현재의 24자 체계가 굳어졌다.
반대를 무릅쓴 왕
1444년 2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훈민정음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세종실록』에 남은 반대 논리는 이렇다.
- 중국을 섬기는 도리에 어긋난다.
- 제 글자를 따로 가진 것은 몽골·여진·일본 같은 나라뿐이다.
- 이두로도 충분하며, 쉬운 글자가 학문을 소홀하게 만든다.
- 언문을 쓴다고 억울한 재판이 줄지는 않는다.
마지막 항목에서 세종의 생각이 거꾸로 드러난다. 세종은 죄인의 진술을 언문으로 적어 읽어 주면 글 모르는 백성도 내용을 알아 억울한 판결이 줄 것이라 여겼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고 되묻고, 이두를 만든 설총의 뜻도 백성을 편하게 하려던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세종의 백성 사랑은 글자에만 있지 않았다. 출산한 관청 여종에게 100일, 그 남편에게 30일의 휴가를 주게 했다. 새 세법(공법)을 정할 때는 1430년 전국 17만여 명의 의견을 물었다. 훈민정음은 이런 통치의 연장선에 있다.
세종은 한자를 버렸을까
흔히 “세종이 천자문을 버리고 28자를 택했다”고 말한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세종은 한자를 폐지하지 않았다. 조선의 공문서와 학문은 이후에도 한문으로 이어졌다.
훈민정음은 한자를 대체하려는 글자가 아니었다. 한자를 모르는 백성이 제 말을 적도록 ‘새로 더한’ 글자였다. 동시에 혼란스러운 한자음을 바로잡는 발음 기호 역할도 했다. 1447년 편찬된 『동국정운』이 그 예다.
세종은 실용에도 힘을 쏟았다. 『용비어천가』와 『석보상절』을 훈민정음으로 펴냈다. 1446년 12월에는 하급 관리 선발 시험에 훈민정음을 넣도록 했다.
한글이 나라의 공식 문자가 된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무렵이다. 반포 후 약 450년이 걸렸다. 그 사이 한글은 여성의 편지, 서민의 소설, 종교 서적 속에서 백성의 글로 살아남았다.
580년 뒤, 28자가 남긴 것
세종이 만든 글자는 지금 스마트폰 자판 위에서 가장 빠르게 조합되는 문자 중 하나다. 자음에 획을 더하고, 천지인 세 획으로 모음을 만드는 원리가 그대로 입력 방식이 됐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어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국보로 지정됐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창제자가 글자의 원리와 목적을 해설서로 직접 남긴 사례는 세계 문자사에서도 드물다.
일흔이 넘어 한글을 배운 할머니가 손주에게 처음 편지를 쓰는 일. 세종이 바란 장면은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글을 아는 것이 권력이던 시대에,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 문을 백성에게 열었다. 28자는 그 마음의 크기다.
참고 자료
- 『훈민정음』 해례본(1446), 세종 어제 서문·정인지 서문
- 『월인석보』 권1 훈민정음 언해본(1459)
- 『세종실록』 세종 26년 2월 20일 최만리 등 상소, 세종 28년 1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