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I 시리즈가 알려준 직업이 있습니다. 법의학자입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이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의 전공은 화학도, 의학도 아니었습니다. 식물학이었습니다.
퍼트리샤 윌트셔(Patricia Wiltshire). 1942년 남웨일스 몬머스셔의 탄광 계곡에서 태어난 법의생태학자이자 식물학자, 화분학자입니다. 여러 나라에서 300건에 가까운 수사에 자문했고, 세라 페인 사건, 밀리 다울러 사건, 크리스토퍼 라버락 미제 사건, 소햄 살인 사건, 입스위치 연쇄살인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가 학부를 다닌 곳이 킹스 칼리지 런던 (King’s College London)입니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 식물학이었습니다.
그 학과는 지금 없습니다.
이 편에서 다루는 영어 palynology · pollen · spore · trace evidence · forensic · forensic ecologist · mature student · expert witness · cold case · exonerate · hedgerow · convalescence
어떤 책인가
『꽃은 알고 있다』의 원제는 Traces: The memoir of a forensic scientist and criminal investigator입니다. 2019년 Blink Publishing에서 나왔습니다. 같은 해 미국에서는 The Nature of Life and Death라는 제목으로 출간됐고, 2024년에는 The Natural History of Crime이 나왔습니다.
내용의 중심은 두 가지입니다. 사건과, 저자 자신의 이력입니다.
일곱 살에 집에서 큰 화상을 입었고, 이후 반복된 흉부 감염으로 폐에 영구적 손상이 남으면서 학교 교육이 중단됐습니다. 회복기 동안 그녀가 한 일은 백과사전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1960년부터 1964년까지 의료 실험실 기사로 일했고, 그 뒤 사업 분야에서 일하다가 1970년 킹스 칼리지 런던에 입학했습니다. 스물여덟이었습니다. 졸업 후 몇 년간 그곳에서 미생물 생태학과 일반 생태학을 가르쳤고, 이어 UCL 고고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법의학과의 접점은 훨씬 뒤에 생깁니다. 1994년 하트퍼드셔 경찰이 살인 사건 자문을 요청했습니다. 도랑에서 남성 시신이 발견됐고, 경찰에게는 타이어 자국과 차량 한 대가 있었지만 그 차가 그 자국을 냈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차 안에서 나온 꽃가루와 포자를 분석한 그녀의 결과가 유죄 판결에 기여했고, 그것이 법의생태학자로서의 경력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그때 그녀는 쉰둘이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소햄 사건입니다. 의복과 신발, 차량에서 나온 토양·식물 증거가 피해자인 제시카 채프먼과 홀리 웰스가 발견된 장소와 이언 헌틀리를 연결했습니다. 시신 유기 지점의 식물 생장을 관찰하고 실험함으로써 두 소녀가 도랑에 놓인 시점을 매우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었고, 이 증거는 헌틀리의 유죄 판결에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라버락 사건은 아홉 살 아이가 살해된 지 30년이 지난 사건이었습니다. 피해자의 의복에 남은 특이한 꽃가루와 식물 물질, 시신을 물속에 가라앉히는 데 쓰인 장식용 벽돌을 삼촌 멜빈 리드의 집에서 나온 것과 연결했습니다. 30년에 걸친 이 수사는 험버사이드 경찰의 최장기 미제 사건이었고 2012년에 해결됐습니다.
여기서 짚고 갈 영어 — 흔적과 증언의 어휘
palynology / palynologist — 화분학, 꽃가루와 포자를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그리스어 palynein(뿌리다)에서 왔습니다. 영어권 자료에서 이 분야를 가리킬 때 botany보다 정확한 단어입니다.
pollen / spore — 꽃가루와 포자. 둘 다 불가산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much pollen). spore는 균류와 양치식물 쪽입니다.
trace evidence — 미세증거. 이 책 원제 Traces가 그대로 이 개념입니다. trace는 ‘추적하다’라는 동사이기도 하지만, 법의학 문맥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지만 남아 있는 것’을 뜻하는 명사입니다.
forensic — 라틴어 forum(광장, 법정)에서 왔습니다. 어원은 ‘법정에서 다투는’입니다. forensic science를 ‘법의학’으로 옮기지만, 실제 범위는 훨씬 넓어 법정에 제출되는 모든 과학 증거를 가리킵니다. 의학에 한정된 말이 아닙니다.
forensic ecologist — 법의생태학자. 그녀가 사실상 만들어낸 직함입니다. 학과 이름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기존 학문을 조합해 도달하는 자리입니다.
expert witness — 전문가 증인. 그녀는 검찰과 변호인 양쪽 모두를 위해 활동해온 전문가 증인이며, 국가범죄수사국(National Crime Agency)의 등록 전문가입니다. 영국 사법 체계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는 용어입니다.
exonerate — 무고함을 밝히다, 혐의를 벗기다. 그녀의 일을 소개하는 문구에는 살인 사건 해결과 시신 위치 특정만이 아니라 억울하게 지목된 사람의 혐의를 벗기는 일도 함께 언급됩니다. 법률 영어의 핵심 동사입니다.
cold case — 미제 사건. 수사가 중단된 채 오래 남아 있는 사건입니다.
mature student — 성인 입학생. 이 단어는 뒤에서 따로 다룹니다.
hedgerow — 밭과 밭 사이를 가르는 산울타리입니다. 영국 시골 경관의 기본 요소이자, 그녀의 작업에서 표본이 나오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텔레그래프가 그녀를 다룬 기사 제목에 이 단어가 들어갔습니다.
convalescence — 회복기. 병이나 부상 후 몸을 추스르는 기간입니다. 동사형은 convalesce입니다.
그 학과는 왜 사라졌는가
KCL 기록보관소에 따르면 식물학은 1831년부터 이 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1964년 생물학부(School of Biological Studies)에 편입됐고, 1985년 킹스·퀸엘리자베스칼리지·첼시칼리지의 3자 합병 때 확대된 생물학과로 흡수됐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조직 개편을 거쳐 1998년부터는 보건생명과학대학 소속 생명과학부에 속하게 됩니다.
같은 기록에서 ‘식물학과’라는 단위 자체의 존속 기간은 1973년까지로 표기돼 있습니다.
윌트셔가 학부를 다닌 기간이 1970년부터 1973년입니다. 학과 이름이 사라지는 시점과 겹칩니다.
이건 KCL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영국 전역에서 botany와 zoology라는 학과 이름이 이 시기를 전후해 대부분 사라집니다. 생물학의 무게중심이 개체와 분류에서 분자와 미생물로 옮겨간 결과입니다.
즉 윌트셔는 사라져가는 학문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라져가는 지식으로 아무도 하지 않던 일을 만들어냈습니다. 꽃가루를 알아보는 능력은 1970년대에 이미 사양 기술이었고, 1994년 하트퍼드셔의 도랑에서 그것이 다시 필요해졌습니다.
지금 이 경로를 따라가면
학부 단계에 해당하는 것은 KCL 생명의과학부입니다.
현재 KCL의 Biomedical Science BSc는 공통 1학년 구조입니다. 1학년에 전 분야를 다룬 뒤 2학년부터 학위를 고릅니다. 선택지는 해부·발생·인체생물학, 생화학, 생명의과학, 의학생리학, 분자유전학, 신경과학, 약리학입니다.
입학 요건은 A레벨 AAA에 화학과 생물 필수, IB 총점 36점에 HL 생물·화학 6점 이상, 아이엘츠 전체 6.5에 각 영역 6.0 이상입니다. 자세한 통계와 요건은 「영국 대학별 입결 통계 ①」에서 다뤘습니다.
대학원 단계는 UCL 고고학연구소입니다.
그녀는 UCL에서 법의고고학 과학 석사 과정을 개설했고, 그 과정은 그녀가 떠난 뒤에도 이어졌습니다. 다만 현재 UCL 고고학연구소의 대학원 과정 목록에 그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 개설된 석사 과정에는 고고과학(기술과 재료), 생물고고학·법의인류학, 계산고고학, 환경고고학, 고인류학·구석기고고학 등이 있습니다.
이 경로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생물고고학·법의인류학 석사입니다. 1년 과정이고, 2026/27 학년도 기준 등록금은 영국 학생 16,800파운드, 해외 학생 35,400파운드입니다. UCL 고고학연구소는 2025년 QS 세계 과목별 순위에서 3위에 올랐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윌트셔의 경로는 학부에서 법의학을 전공한 것이 아니라, 학부에서 기초 생물학을 하고 대학원과 현장에서 법의학으로 넘어간 형태입니다. 학부 단계에서 forensic science 학위를 고르는 것만이 이 분야로 가는 길은 아닙니다.
mature student라는 말
이 책이 한국 학생과 학부모에게 주는 가장 실질적인 메시지는 사건이 아니라 나이입니다.
그녀는 성인 입학생(mature student)으로 킹스 칼리지 런던에 들어갔습니다. 스물여덟에 시작해 서른하나에 마쳤습니다. 그 전 10년 이상은 의료 실험실 기사와 사업 분야에서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영국 대학에서 mature student는 정식 분류입니다. 통상 학부 입학 시 21세 이상을 가리키며, 학교 성적 대신 직무 경험과 별도 자격을 근거로 평가받는 경로가 마련돼 있습니다.
KCL의 경우 Access to Higher Education Diploma가 정식 인정 자격으로 명시돼 있고, 이미 학위 과정을 마쳤거나 진행 중인 지원자는 그 학업 내용을 평가에 반영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과목 요건은 여전히 충족해야 합니다.
단, 학교마다 다릅니다. 임페리얼 기계공학은 Access to HE Diploma를 아예 인정하지 않습니다. 같은 자격이 한 학교에서는 문이고 다른 학교에서는 벽입니다.
A레벨에 나이 제한이 없다는 말은 여기서 나옵니다. 제도가 그렇게 설계돼 있습니다. 다만 어느 학교의 어느 과정이 그 경로를 받아주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영어 공부에 어떻게 쓰나
이런 회고록은 원서 읽기 재료로 특히 좋습니다.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어휘가 반복된다는 점입니다. pollen, spore, trace, sample, deposition 같은 단어가 사건마다 다시 나옵니다. 소설과 달리 어휘 범위가 좁고 밀도가 높아서, 사전을 찾지 않고 문맥으로 뜻을 잡아내는 훈련에 적합합니다. 한국어판을 먼저 읽고 원서를 읽으면 내용을 이미 알고 있으니 흐름이 끊기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개인진술서(personal statement)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다만 방식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읽은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문단은 영국 대학 입학사정에서 가장 흔하고 가장 약한 문단입니다. 필요한 것은 요약이 아니라 반응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도랑의 식물 생장으로 사망 후 경과 시간을 추정한 대목을 읽고, 그 추정이 얼마나 정밀할 수 있는지, 어떤 조건에서 무너지는지 궁금해졌다고 쓰는 것. 그리고 그 궁금증 때문에 무엇을 더 찾아봤는지 쓰는 것입니다.
책은 출발점으로 쓰고, 문단의 무게는 지원자 본인의 사고에 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입결 통계는 한 해의 사진입니다. KCL 생화학 합격률 16.0%는 2025년의 숫자입니다.
스물여덟에 학부를 시작해 쉰둘에 분야 하나를 만든 사람의 이력은 그 사진 바깥에 있습니다. 둘 다 알아야 합니다. 숫자를 모르면 준비를 못 하고, 숫자만 알면 길이 하나뿐인 줄 알게 됩니다.
함께 읽기 [영국 대학별 입결 통계 ①] 킹스 칼리지 생화학은 지원자 85%에게 오퍼를 줍니다. 합격은 16%입니다.
다음 편 [책으로 보는 영국 대학 ②] 초가공식품의 습격 — UCL 교수가 한 달 동안 초가공식품만 먹었습니다
출처
- Patricia Wiltshire,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Patricia_Wiltshire
- BBC Radio 4, Desert Island Discs, “Professor Patricia Wiltshire, forensic scientist”
- King’s College London Archives, 학과 기록. https://archives.kingscollections.org/
- King’s College London, 학부 과정 안내 및 입학 요건
- UCL, Bioarchaeological and Forensic Anthropology MSc 및 고고학연구소 대학원 과정 목록
- Patricia Wiltshire, Traces: The Memoir of a Forensic Scientist and Criminal Investigator, Blink Publishing, 2019 (ISBN 978-1788700610)
자료 구분
인물 이력과 사건 내용은 위키피디아 항목, BBC 라디오 4 프로그램 소개문, 출판사 저자 소개에 근거합니다. KCL 식물학과의 조직 변천은 KCL 기록보관소의 학과 기록 항목에 근거하며, 학과 존속 시점에 대해 항목 간 표기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1973년 종료 표기와 1985년 흡수 서술) 양쪽을 모두 적었습니다. 현재 입학 요건과 등록금은 각 대학 공식 안내 기준이며 연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forensic과 palynology의 어원, mature student 제도 일반, 개인진술서 관련 조언, 학문 무게중심 이동에 대한 해석은 출처 자료에 없는 배경지식과 판단입니다. 한국어판 『꽃은 알고 있다』의 출판사와 발행 정보는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게재 전 확인이 필요합니다.
주의
지원 연도의 입학 요건과 과정 개설 여부는 반드시 각 대학 공식 안내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