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 해양 협력의 다음 장은 ‘건조’가 아니라 ‘설계’와 ‘동력’… 초기설계·터빈 연구의 본산은 여전히 영국 대학이다
[해설] 영국 찰스 3세 국왕의 여동생 앤 공주(HRH The Princess Royal)와 부군 티모시 로런스 경이 7월 13일부터 15일까지 한국을 찾았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 8년 만, 앤 공주 개인으로는 네 번째 방한이다.
표면적 명분은 분명하다. 6·25전쟁 영국군 참전 75주년, 그리고 임진강 전투 75주년이다. 앤 공주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참전용사들을 추모했다. 그러나 사흘 일정에서 가장 긴 시간이 배정된 곳은 추모 시설도, 청와대도 아니었다. 울산 HD현대중공업 조선소였다.
일각에서는 이 일정을 두고 “언론이 다루지 않는 숨은 목적”을 이야기한다. 사실관계는 그 반대에 가깝다. 청와대는 접견 하루 전 브리핑에서 이번 방한 의제로 고위급 교류, 교역·투자, 과학기술, 문화, 그리고 교육을 명시적으로 공개했다. 숨겨진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왕실 방문을 ‘의전 뉴스’로만 읽는 습관 때문에 산업·교육 함의가 뒤로 밀렸을 뿐이다.

1. 도크 위에서 오간 두 단어: 롤스로이스, 그리고 등대
앤 공주는 울산에서 정기선 HD현대 회장 등 경영진과 선박 건조 시설을 둘러본 뒤, 청와대 접견 자리에서 한국의 조선·중공업·제철 기술 수준을 “경이로운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한·영 간 다양한 해양 협력이 진행 중이며 HD현대중공업이 롤스로이스를 비롯한 영국 기업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부산 항만 시찰에서는 등대 관련 시설을 봤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의례적 덕담으로 들리지만, 이 세 단어 — 조선소, 롤스로이스, 등대 — 는 한·영 해양 관계의 구조를 정확히 요약한다.
- 조선소: 한국은 세계 최상위 건조 능력을 가진 나라다.
- 롤스로이스: 영국은 선박·함정의 동력계통(가스터빈, 추진 시스템, 소형모듈원자로)을 쥐고 있다.
- 등대: 영국은 해상 안전·항로·인증 체계, 즉 ‘바다의 규칙’을 만들어 온 나라다. 로이드선급(Lloyd’s Register)이 상징적이다.
한국이 ‘만드는 힘’이라면 영국은 ‘정하는 힘’과 ‘움직이는 힘’을 쥐고 있다. 앤 공주의 동선은 그 분업 구조를 그대로 따라갔다.
2. 한국이 약한 지점: 초기 설계(Early-Stage Ship Design)
조선업에서 부가가치가 가장 크게 갈리는 구간은 절단·용접이 아니라 초기 설계다. 아직 도면이 확정되기 전, 함정이나 특수선의 개념·배치·임무 요구를 결정하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 잘못 잡힌 개념은 이후 수천억 원으로 되돌아온다.
이 분야의 학문적 원산지가 영국, 그중에서도 UCL(University College London) 이다.
UCL의 데이비드 앤드루스(David Andrews) 교수는 영국 국방부에서 프리깃·기뢰대응함 부문 책임자를 지낸 뒤 UCL에 부임한 인물로, 함정 설계 방법론 분야의 국제적 권위자로 평가된다. 그가 정립한 설계 빌딩 블록(Design Building Block) 접근법은 선박의 모든 구성 요소를 기능 단위로 분류해 초기 단계에서 균형 잡힌 설계를 도출하는 방식이며, 상용 함정 설계 CAD 소프트웨어 Paramarine의 SURFCON 모듈로 구현돼 실제 산업 현장에서 쓰이고 있다. 잠수함과 항공모함까지 적용 범위가 넓다.
UCL 해양공학 석사(Naval Architecture MSc)의 핵심은 강의가 아니라 Ship Design Exercise다. 180학점 중 45학점이 여기에 배정되며, 학생들은 해양공학 석사생과 다학제 팀을 이뤄 하나의 선박을 통째로 설계한다. 사실상 설계 사무소 인턴십을 학위 안에 넣은 구조다.

3. 조선 강국의 대학 지도: 글래스고, 뉴캐슬, 사우샘프턴
영국 조선 교육의 무게중심은 런던 한 곳이 아니다.
스트라스클라이드대(Glasgow) 는 상하이랭킹(ARWU) 기준 해양·조선공학 분야에서 영국 1위, 세계 톱10을 유지하고 있다. 예인수조와 조파수조, 엔진 실험실, VR 랩, 풀미션 선교(브리지) 시뮬레이터를 갖췄고, 33피트 요트 실습까지 학부 과정에 포함돼 있다. 왕립조선학회(RINA)와 해양공학회(IMarEST) 인증 과정이며, 석사 과정에서는 3~5명이 컨설턴트 팀을 구성해 10주간 신개념 선박 또는 해양 구조물을 개념설계하고 산업계 패널 앞에서 발표한다.
뉴캐슬대는 예인수조에 더해 바람·파랑·조류를 동시에 구현하는 복합 수조를 운용하며, 선박 및 시스템 설계, 해양 생산관리 같은 실무형 모듈을 학부에 배치했다.
사우샘프턴대는 138m 예인수조와 울프슨 유닛(Wolfson Unit)을 기반으로 저항·추진, 유체역학 중심의 해양공학 석사를 운영한다. 로이드선급 실무자가 강의에 참여하는 점이 특징으로, 인증 체계와 교육이 붙어 있는 영국식 모델을 보여준다.
4. 그리고 터빈: 케임브리지 휘틀 연구소라는 성역
앤 공주가 언급한 롤스로이스의 뿌리를 따라가면 대학 연구소가 나온다.
케임브리지대 휘틀 연구소(Whittle Laboratory) 는 제트엔진을 발명한 프랭크 휘틀의 이름을 딴 곳으로, 1970년대 초 문을 연 이래 롤스로이스와 반세기 넘게 협력해 왔다. 롤스로이스가 1990년대부터 세계 30여 개 대학에 구축한 UTC(University Technology Centre) 네트워크의 원형이 바로 이 관계에서 나왔다. 케임브리지는 드물게 두 개의 UTC — 가스터빈 파트너십과 소재 UTC — 를 동시에 보유한 대학이다. 연구 대상은 제트엔진에 그치지 않고 가스터빈, 증기터빈, 터보차저, 조력발전 터빈까지 걸쳐 있다. 선박 추진과 직결되는 영역이다.
박사 단계에서는 케임브리지·옥스퍼드·러프버러 3개교 공동의 EPSRC 박사양성센터(Future Propulsion and Power) 가 중심이다. 세 대학이 각각 압축기, 연소기, 터빈 공기역학을 나눠 맡고, 학생은 1년 차에 세 곳과 산업 현장을 모두 경험한 뒤 롤스로이스의 실제 기술 로드맵과 연결된 주제를 잡는다. 터빈을 하려면 영국으로 간다는 말이 관성이 아닌 이유다.
5. 결국 배우는 것은 ‘물’과 ‘수소’다
이 분야가 어렵게 들리지만, 학문의 뼈대는 두 개뿐이다. 물(유체역학) 과 연료(동력) 다.
배는 물 위에 뜨고 물을 밀며 나아간다. 그래서 학부 커리큘럼의 절반은 유체다. 스트라스클라이드의 유체역학 모듈은 유체에 작용하는 물리를 이해하고, 정수역학·동수역학 문제를 실제로 계산하는 능력을 목표로 한다. 부력과 복원성, 즉 ‘배가 왜 뒤집히지 않는가’는 2학년의 핵심 주제다.
나머지 절반은 그 배를 무엇으로 움직일 것인가다. 지금 이 질문의 답이 수소와 암모니아로 넘어가는 중이다. 국제해사기구(IMO)의 탈탄소 규제로 선박 연료가 벙커C유에서 대체연료로 이동하고 있고, 이 전환의 승자가 향후 20년 조선업의 판도를 정한다. 스트라스클라이드는 글래스고에 지속가능 해운 연구센터를 새로 열었고, 케임브리지 휘틀 연구소 역시 수소 항공기, 하이브리드 전기 추진, 조력 에너지 변환을 넷제로 연구의 축으로 삼고 있다. 터빈 연구실과 조선 연구실이 같은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풀고 있는 셈이다.
실제 수업은 생각보다 손을 많이 쓴다. 스트라스클라이드 1학년은 공학역학·수학·컴퓨팅과 함께 조별로 컨테이너선을 설계하고 만들어 시험한다. 2학년에는 무선조종 요트와 파력발전 장치를 직접 제작한다. 예인수조, 조파수조, 엔진 실험실, 풀미션 선교 시뮬레이터가 학부생에게 열려 있다.

6. 고등학교에서 준비할 과목: 문은 수학이 연다
한국 학생과 학부모가 가장 자주 오해하는 지점이 여기다. 영국 공대 입시는 과목 수가 적다.
- 필수: 수학, 물리. 이 두 과목이 전부다.
- 권장: 심화수학(Further Maths). 있으면 유리하지만 필수는 아니다.
- 선택: 화학, 컴퓨터과학은 도움이 되는 정도.
실제 기준을 보면, 스트라스클라이드 조선해양공학 MEng은 A-level A*AA~AAB에 수학과 물리에서 A를 요구하고, IB는 36점에 수학·물리 HL 6을 요구한다(1학년 입학 기준은 HL 5). 영어는 IELTS Academic 6.0에 각 영역 5.5 이상이면 지원 가능하다. 즉 수학을 잘하면 나머지는 따라온다. 국어·사회·제2외국어·비교과가 합격을 좌우하지 않는다. 평가 대상이 3~4과목으로 압축되기 때문에, 수리 감각이 있는 학생에게는 오히려 한국 입시보다 통로가 좁고 선명하다.
대학에서 배우는 수학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1학년은 함수·미분·적분·복소수, 이어서 벡터·행렬·수치해석, 2학년에서 미분방정식으로 넘어간다. 고교 수학의 연장선이다.
7. 한국 내신은 그대로 따라오지 않는다
또 하나 짚어야 할 점이 있다. 영국 학부는 한국 고교 내신과 수능 성적표를 그대로 평가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영국 대학은 UCAS를 통해 A-level, IB 등 국제 자격을 기준으로 학생을 뽑기 때문이다. 한국 일반고 졸업생은 통상 파운데이션(International Foundation) 과정을 거쳐 학부 1학년으로 진입하며, 이때 평가되는 것은 파운데이션에서의 수학·물리 성취와 영어 점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한국에서의 내신 등급이 낮았던 학생에게 평가 기준이 다시 설정되는 구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전 과목 평균으로 줄 세워지던 학생이, 수학과 물리 두 과목의 성취로 평가받는 무대로 옮겨가는 것이다.
다만 오해는 없어야 한다. 무시험 입학이 아니다. 파운데이션 성적, 어학 점수, 그리고 왜 이 분야를 하려는지 설명하는 자기소개서(Personal Statement)가 모두 심사된다. 스트라스클라이드는 지원자에게 조선해양공학에 대한 동기와 학업 이력을 담은 개인 진술서를 요구한다. 바뀌는 것은 난이도가 아니라 평가받는 항목이다.
8. 유학 관점에서의 함의
이번 방한이 학생과 학부모에게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한·영 협력의 접점이 ‘무역’에서 ‘기술과 사람’으로 옮겨가고 있고, 그 통로가 대학이라는 점이다.
- 학부(MEng 4년): 스트라스클라이드, 뉴캐슬, 사우샘프턴이 RINA·IMarEST 인증 과정을 운영한다. 실험 시설 접근성이 학부 단계부터 열려 있다는 점이 한국과 가장 다르다.
- 석사(MSc 1년): UCL은 함정·초기설계 방법론, 스트라스클라이드는 개념설계와 CFD, 사우샘프턴은 유체·추진 쪽으로 색이 갈린다. 기계·항공·토목 전공자도 지원 가능하다.
- 박사: 터빈·추진 계열은 케임브리지-옥스퍼드-러프버러 컨소시엄이 사실상 단일 관문이다.
- 진로: 조선소 설계팀, 선급(로이드선급 등), 방산, 해상풍력·해양에너지로 이어진다. 해상풍력은 조선 인력이 대거 이동 중인 분야다.
앤 공주는 KTX 일정 때문에 안동에 들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남긴 것은 방문지 목록이 아니라 하나의 좌표다. 한국이 배를 만드는 동안, 영국은 그 배를 어떻게 설계하고 무엇으로 움직일지를 가르치는 학교를 지켜 왔다는 좌표다. 다음 세대가 그 좌표 위 어디에 설 것인지는, 지금 어느 강의실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참고 출처
- 뉴스핌·문화일보·이뉴스투데이·디지털타임스·서울경제 (2026년 7월 방한 일정 및 접견 발언)
- UCL Naval Architecture MSc 과정 안내 / Ships and Offshore Structures (David Andrews 관련 논고)
- University of Strathclyde, Naval Architecture, Ocean & Marine Engineering (ARWU 2025 순위, 시설, 커리큘럼)
- UCAS / Planit / 스트라스클라이드 입학요건 페이지 (A-level·IB·IELTS 기준)
- Newcastle University, Naval Architecture & Marine Engineering
- University of Southampton, Maritime Engineering Science: Naval Architecture MSc
- University of Cambridge, Whittle Laboratory / Rolls-Royce UTC / Turbo CDT
(※ 인용된 발언은 각 언론 보도에 근거하며, 기사 내 해석과 분석은 필자 견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