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케임브리지의 한 물리학자가 일반 독자를 위한 책을 구상했습니다.
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부 편집자에게 연락했고, 편집자는 방정식을 피하라고 조언했습니다. 편집진의 판단은 이랬습니다. 원고에 과학이 너무 많아서 팔리지 않겠다. 그리고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방정식 하나가 들어갈 때마다 판매가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는 원고를 고쳤습니다. 방정식이 하나만 남을 때까지 고쳤습니다.
남은 하나는 E = mc²였습니다.
이 편에서 다루는 영어 Lucasian Professor · chair · readership · cosmology · singularity · black hole · analogy · accessible · layman · bestseller · abridged
케임브리지의 상징인데 학부는 옥스퍼드였습니다
스티븐 호킹은 1942년 옥스퍼드에서 의사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1959년 10월, 열일곱에 옥스퍼드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대학 교육을 시작해 물리학 학사 최우등으로 졸업했습니다.
케임브리지로 간 것은 대학원 때입니다. 1962년 10월 트리니티 홀에서 시작해 1966년 3월 응용수학·이론물리학 박사를 받았습니다. 전공은 일반상대성이론과 우주론이었습니다.
1963년, 스물한 살에 조기 발병하고 진행이 느린 형태의 운동신경세포병 진단을 받습니다.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몸이 마비됐고, 말을 잃은 뒤에는 음성 생성 장치로 소통했습니다. 처음에는 손에 쥔 스위치를 썼고, 나중에는 뺨의 근육 하나를 썼습니다.
1974년, 블랙홀이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지금 호킹 복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논쟁적이었지만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이론물리학의 중대한 돌파구로 널리 받아들여집니다. 같은 해 역대 최연소 수준의 나이로 왕립학회 회원이 됐습니다.
1979년, 케임브리지 루커스 수학 석좌교수가 됩니다. 아이작 뉴턴이 앉았던 자리입니다. 2009년까지 재직했습니다.
하나만 남기기
책을 완성한 시점이 공교롭습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 출간 300주년을 케임브리지에서 기념하도록 그가 앞장서 이끌기 직전이었습니다. 뉴턴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 뉴턴의 기념행사를 준비하며 원고를 마쳤습니다.
1988년 4월 1일, 만우절에 출간됐습니다. 런던 밴텀 프레스입니다. 미국판이 동시에 나왔습니다. 초판에 오식이 여럿 있어 회수됐고, 그래서 초판 유통본이 드뭅니다.
칼 세이건이 서문을 썼고, 호킹을 뉴턴과 폴 디랙 양쪽의 합당한 후계자라고 평했습니다.
결과는 이렇습니다.
- 런던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4년 넘게 머물렀습니다
- 900만 부 이상 팔렸고, 다른 집계로는 1,000만 부를 넘습니다
- 60개 넘는 언어로 번역됐습니다
- 베스트셀러 목록 체류 기간으로 기네스북에 올랐습니다
방정식을 하나만 남긴 결정이 그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이 원칙은 후속작에서도 지켜졌습니다. 2005년 레너드 믈로디노프와 함께 낸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도 같은 방침을 따랐습니다. 시공간 다이어그램을 빼고 컬러 삽화로 바꿨으며, 혼돈 경계 조건(Boundary conditions)과 같은 복잡한 수학 같은 어려운 주제를 덜어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별명이 있습니다
“가장 많이 팔렸지만 가장 안 읽힌 책.”
실제로 그렇게 불렸습니다. 원서는 고전 물리 개념을 부드럽게 소개하며 시작하지만, 곧 복잡한 시공간 다이어그램과 만만치 않은 기술적 주제들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호킹의 책을 ‘설명해주는’ 책들이 하나의 장르처럼 생겨났습니다.
이 사실이 이 편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방정식을 없앤다고 내용이 쉬워지지는 않습니다. 방정식은 어려움의 원인이 아니라 압축의 도구입니다. 압축을 풀면 문장이 길어지고, 개념 사이의 관계를 독자가 머릿속에서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호킹이 한 것은 어려운 내용을 쉽게 만든 것이 아니라, 독자가 감당할 수 있는 인지 부담을 계산해서 형식을 다시 설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설계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짚고 갈 영어 — 학계 직위와 설명의 어휘
Lucasian Professor — 루커스 수학 석좌교수. 1663년 헨리 루커스의 기부로 만들어진 케임브리지의 석좌직입니다. 뉴턴, 디랙, 호킹이 거쳐갔습니다. 영국 대학에서 특정 이름이 붙은 교수직은 기부자나 기념 대상의 이름을 딴 석좌직(named chair)입니다.
chair — 의자가 아니라 석좌, 교수직입니다. hold a chair(석좌직을 맡다), be appointed to the chair of physics처럼 씁니다. 회의의 ‘의장’이라는 뜻도 있어 문맥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readership — 두 가지 뜻이 있어 헷갈립니다. 하나는 독자층·독자 수입니다. 편집자가 경고한 것이 방정식 하나마다 readership이 절반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영국 대학의 직급인 reader(부교수급)의 자리입니다. 영국 학계 직급은 lecturer → senior lecturer → reader → professor 순인데, 미국의 assistant/associate/full professor와 대응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영국에서 professor는 미국보다 훨씬 좁은 최상위 직급입니다.
cosmology — 우주론. 우주 전체의 기원과 구조를 다루는 분야입니다. astronomy(천문학), astrophysics(천체물리학)와 구분됩니다.
singularity — 특이점. 물리량이 무한대가 되어 기존 이론이 작동하지 않는 지점입니다. 호킹은 로저 펜로즈와 함께 일반상대성이론 틀에서 중력 특이점 정리를 연구했습니다. 최근에는 AI 맥락에서 다른 뜻으로도 쓰이니 문맥을 봐야 합니다.
black hole — 블랙홀. 지금은 일상어지만 비교적 최근에 정착한 용어입니다.
analogy — 비유, 유추. 이 책의 주된 설명 도구입니다. by analogy with(~에 빗대어), draw an analogy(비유를 들다)로 씁니다. 면접에서 어려운 개념을 설명해보라고 할 때 요구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accessible — 접근 가능한. 물리적 접근성 외에 **”전문 지식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이라는 뜻으로 매우 자주 쓰입니다. an accessible introduction(입문자도 읽을 수 있는 개론)처럼 씁니다. 영국 대학 과정 소개와 서평에 계속 나오는 단어입니다.
layman / lay reader — 비전문가, 일반 독자. lay는 원래 ‘성직자가 아닌’이라는 뜻이었고, 거기서 ‘그 분야 전문가가 아닌’으로 확장됐습니다. in layman’s terms(쉬운 말로)가 흔한 표현입니다.
abridged — 축약된. ④편에서 다룬 것과 같습니다.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는 abridgement가 아니라 다시 쓴 것이라 별개의 책입니다.
이 책을 학생에게 어떻게 쓸 것인가
물리·수학·공학 지원자에게 권할 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었다고 개인진술서에 쓰는 것은 위험합니다. 너무 많은 지원자가 씁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별명 때문에, 읽었다고만 쓰면 정말 읽었는지 의심받을 수 있습니다.
대신 이런 각도가 있습니다.
이 책의 제작 과정 자체가 소재입니다. 방정식을 지우고 서술로 바꾸면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지는가. E = mc² 하나만 남긴 결정은 옳았는가. 그 결정 때문에 이 책이 “가장 안 읽힌 책”이 됐다면, 대중 과학 글쓰기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건 실제로 열려 있는 질문이고, 면접에서 논의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옥스브리지 면접은 취업 면접이 아니라 모의 튜토리얼에 가깝습니다. 앞선 「영화 속 옥스퍼드」 시리즈에서 다룬 대로, 평가 대상은 지식이 아니라 배울 수 있는 자질입니다. 낯선 문제를 받았을 때 입장을 정하고, 반론이 들어왔을 때 함께 밀고 나갈 수 있는가입니다.
“방정식을 없애야 하는가”는 그 연습에 좋은 질문입니다. 정답이 없고, 양쪽 근거가 다 있고, 입장을 정해야 논의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글쓰기 자체에 관해
이 편의 교훈은 물리학 지원자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을 다 넣으면 읽히지 않습니다.
개인진술서가 그렇습니다. 4,000자 안에 자기가 한 모든 것을 밀어 넣으면, 읽는 사람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호킹의 편집자가 한 말을 개인진술서에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항목 하나를 추가할 때마다 나머지 항목이 절반씩 흐려진다.
앞선 시리즈에서 정리한 원칙과 같습니다.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상대에게 아무 정보도 주지 못합니다. 하나를 택하고 그것으로 무엇을 할 건지 말해야 합니다.
호킹은 방정식 하나를 택했습니다.
지금 이 학교에 가려면
「영국 대학별 입결 통계 ⑦」에서 다룬 대로입니다.
케임브리지의 2025년 수치는 지원 22,513건, 오퍼 4,893건(21.7%), 등록 3,669명(16.3%)입니다. 대학은 이를 평균 자리 하나당 여섯 명이 지원한다고 설명합니다.
국적별로 갈립니다. 영국 거주 지원자 19.6%, 영국 외 10.7%입니다. 국가별로는 싱가포르 23.1%, 홍콩 14.3%, 중국 9.8%, 미국 5.5%입니다.
이 책과 이어지는 과목의 오퍼율은 자연과학 25.8%, 수학 25.1%입니다.
수학은 숫자만 보면 안 됩니다. 케임브리지 수학은 A레벨 수학과 심화수학에서 A*를 요구하고, 여기에 STEP 1등급 또는 2등급을 조건으로 붙입니다. STEP은 6월에 A레벨과 함께 치릅니다. 오퍼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퍼 이후가 관문입니다.
네 번째 A레벨은 필요 없습니다. 케임브리지는 오퍼가 보통 13학년에 이수하는 세 과목을 기준으로 하며, 네 번째 A레벨을 요구하지 않고 통상 유리하게 작용하지도 않는다고 명시합니다.
마감은 10월 15일이고, 옥스퍼드와 동시 지원은 불가능합니다.
시리즈를 마치며
일곱 편에서 다룬 사람들을 나란히 놓아봅니다.
식물학을 배웠는데 법의생태학을 만들었습니다. 감염내과 의사인데 식품 규제를 연구합니다. 물리학에서 부진했는데 SF의 아버지가 됐습니다. 전시에 소방 감시원으로 일하며 저녁에 원고를 썼습니다. 음악과에 떨어져 영문학을 했고 인공 언어를 만들었습니다. 수학 강사였는데 동화를 썼습니다. 옥스퍼드에서 학부를 마치고 케임브리지에서 뉴턴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도 계획대로 가지 않았습니다.
「영국 대학별 입결 통계」 여덟 편은 숫자를 다뤘습니다. 오퍼율과 합격률, 과목별 격차, 국적별 차이입니다. 그 숫자는 정확하고, 지원 전략을 짤 때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숫자는 한 해의 사진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다룬 일곱 사람의 이력은 어느 입결표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두 시리즈를 함께 읽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숫자를 모르면 준비를 못 하고, 숫자만 알면 길이 하나뿐인 줄 알게 됩니다.
함께 읽기 [영국 대학별 입결 통계 ⑦] 케임브리지: 떨어진 지원자를 다시 뽑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전 편 [책으로 보는 영국 대학 ⑥]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이 동화를 쓴 사람은 옥스퍼드 수학 강사였습니다
시리즈 목차 ① KCL — 꽃은 알고 있다 ② UCL — 초가공식품의 습격 ③ 임페리얼 — 우주전쟁 ④ LSE — 노예의 길 ⑤ 맨체스터 — 시계태엽 오렌지 ⑥ 옥스퍼드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⑦ 케임브리지 — 시간의 역사 (이 글)
출처
- Stephen Hawking, Wikipedia
- The Marginalian, “Stephen Hawking on What Makes a Good Theory”
- Shapero Rare Books 및 Maggs Bros, 『시간의 역사』 초판 서지 기록
- Times Higher Education, A Briefer History of Time 서평
- EBSCO Research Starters, A Brief History of Time 항목
- Stephen Hawking, A Brief History of Time, Bantam Press, 1988
자료 구분
호킹의 학력, 진단, 루커스 석좌교수 재직 기간, 호킹 복사는 위키피디아 항목에 근거합니다. 케임브리지대 출판부 편집자의 조언과 방정식에 관한 경고, 원고 수정 경위는 복수의 서지 기록과 서평에서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다만 이 일화는 호킹 본인의 서문에 나온 서술을 여러 매체가 인용한 것이며, 세부 표현은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판매 부수와 번역 언어 수는 자료에 따라 900만 부·60개 언어, 1,000만 부·35개 언어로 갈리며 양쪽을 병기했습니다. “가장 많이 팔렸지만 가장 안 읽힌 책”이라는 평가는 서평에 인용된 표현입니다. 영국 학계 직급, chair, accessible, layman 등 어휘 해설과 글쓰기에 관한 논의는 일반 배경지식과 제 판단입니다. 케임브리지 입학 통계와 요건은 「영국 대학별 입결 통계 ⑦」의 출처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