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버지스가 맨체스터대학교에 지원할 때 쓴 원서에는 음악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떨어졌습니다. 음악과가 그의 지원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문학과로 갔습니다. 1940년에 영어영문학 학위로 졸업합니다.
그 영문학 학위에서 영어 소설사상 가장 유명한 인공 언어가 나왔습니다.
이 편에서 다루는 영어 argot · register · loanword · rhyming slang · constructed language · dystopia · free will · subliminal · primer · conditioning
먼저 말씀드릴 것
『시계태엽 오렌지』는 폭력을 정면으로 다루는 소설입니다. 10대 갱단의 폭력이 상세하게 묘사되고, 성폭력 장면도 있습니다. 큐브릭의 영화는 영국에서 오랫동안 상영이 중단됐던 작품입니다.
이 글은 이 책의 언어와 그 언어가 나온 학교를 다룹니다. 학생에게 권할 때는 내용을 먼저 확인하시고, 연령과 성향을 고려해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뒤에서 다룰 나드샛의 원리는 책을 읽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게 정리했습니다.
떨어진 지원 하나
버지스는 1917년 맨체스터 하퍼헤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자베리오 칼리지 (Xaverian College)를 거쳐 맨체스터대학교(당시 빅토리아 맨체스터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원래 지망은 음악이었습니다. 음악과가 그의 지원을 받아주지 않아 영문학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평생 자기를 작곡가로 여겼습니다. 문학은 나중에 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졸업 후 6년간 육군에서 복무했고(교육 병과였습니다), 이후 교사와 식민지 교육관으로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에서 일했습니다. 『말라야 3부작 (The Malayan Trilogy)』의 성공으로 1959년에야 전업 작가가 됩니다. 마흔둘이었습니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1962년 3월 17일 윌리엄 하이네만에서 나왔습니다.
나드샛 — 이 시리즈에서 가장 실용적인 대목
1961년, 버지스는 레닌그라드로 작업 여행을 갑니다. 그 여행을 위해 기초 러시아어를 배웠습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됐습니다. **나드샛(Nadsat)**입니다. 러시아어로 ’10대’를 뜻하는 말이고, 열다섯 살 화자 알렉스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언어입니다.
구성은 이렇습니다.
- 러시아어 어휘 — 가장 큰 비중입니다. 대체로 영어식으로 살짝 다듬은 차용어이며, 원래 러시아어 발음을 상당히 유지합니다
- 각운 은어(rhyming slang) — 실재하는 것과 지어낸 것이 섞여 있습니다
- 도둑 은어
- 로마니어 표현 몇 개
예를 들면 droog는 친구, horrorshow는 ‘좋은’이라는 뜻입니다. 후자는 러시아어 хорошо(호로쇼, 좋다)에서 왔습니다. 영어 단어 두 개처럼 보이지만 영어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합니다.
버지스 본인이 나드샛의 목적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이 소설을 **세뇌 교본(brainwashing primer)**으로 만들려는 장치였고, 독자가 책을 다 읽고 나면 노력 없이, 그리고 스스로도 놀라면서 최소한의 러시아어 어휘를 갖게 되도록 의도했다는 것입니다.
소설 안에서도 이 원리가 언급됩니다. 알렉스를 심문하는 사람들은 그가 쓰는 은어의 출처를 **”잠재의식적 침투(subliminal penetration)”**라고 설명합니다.
소설 한 권이 어휘 습득 이론을 그대로 구현한 사례입니다.
이것이 영어 공부와 무슨 상관인가
직접 상관이 있습니다.
원서를 읽을 때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지 말고 문맥으로 추론하며 흐름을 따라가라는 조언이 있습니다. 이 방법이 왜 통하는지를 버지스가 실험으로 보여줬습니다.
나드샛은 처음 열 쪽에서 거의 읽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계속 읽으면 뜻이 잡히기 시작합니다. 같은 단어가 다른 문맥에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 읽고 나면 실제로 러시아어 단어를 알게 됩니다. 외우려고 한 적이 없는데 남습니다.
이게 우연이 아니라 작가의 설계였습니다.
영어 원서를 읽을 때 학생들이 가장 자주 하는 실수가 모르는 단어마다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맥이 끊기고, 문맥이 끊기면 추론이 불가능해집니다. 추론이 없으면 단어가 남지 않습니다. 사전으로 확인한 단어는 확인한 순간 잊힙니다.
버지스가 만든 것은 그 반대 상황을 강제하는 장치였습니다. 나드샛은 사전에 없으니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문맥으로 뚫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참고로 지금 나오는 판본에는 나드샛 용어집이 실린 것이 많습니다. 편집자 앤드루 비스웰이 정리한 복원판이 대표적입니다. 어휘 습득 효과를 보려면 처음 읽을 때는 용어집을 보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밑에 깔린 또 하나의 층
나드샛이 러시아어에서 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앤서니 버지스 재단이 짚는 대목이 하나 더 있습니다.
1973년 버지스가 이 소설을 낭독한 녹음이 남아 있는데, 그 낭독을 들어보면 화자의 목소리에 맨체스터 억양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가 하퍼헤이와 모스사이드 거리에서 자라며 들은 말입니다.
러시아어 밑에 맨체스터 노동계급의 말이 깔려 있는 셈입니다.
이건 이 시리즈 전체와 이어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③편의 웰스는 포목상 견습생이었고, ①편의 윌트셔는 남웨일스 탄광 계곡에서 태어났습니다. 영국 대학과 문학을 다룰 때 계급과 지역은 배경이 아니라 내용입니다.
여기서 짚고 갈 영어 — 언어를 말하는 언어
이 편의 어휘는 다른 편과 성격이 다릅니다. 제도나 학문이 아니라 언어 자체를 설명하는 말들입니다. 영문학·언어학 지원자에게는 필수 어휘입니다.
argot — 특정 집단만 쓰는 은어입니다. 프랑스어에서 왔고, 원래는 도둑이나 범죄자 집단의 말을 가리켰습니다. 나드샛이 argot으로 분류됩니다. slang보다 좁고 폐쇄적인 느낌입니다.
register — 언어 사용역. 상황과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말의 격식 수준입니다. 같은 사람이 면접에서 쓰는 말과 친구에게 쓰는 말이 다른데, 그 차이가 register입니다. 영어 시험과 에세이 평가에서 매우 자주 쓰이는 용어입니다. 아이엘츠 채점 기준에도 등장합니다.
loanword — 차용어. 다른 언어에서 그대로 가져온 단어입니다. 영어의 kimchi, 한국어의 ‘컴퓨터’가 그것입니다. 나드샛의 러시아어 단어들이 영어식으로 살짝 다듬어진 loanword입니다.
rhyming slang — 각운 은어. 런던 코크니 은어의 대표적 방식입니다. 어떤 단어를 그것과 운이 맞는 표현으로 바꿔 부릅니다. 원래 단어가 뭔지 모르면 알아들을 수 없어서, 외부인을 배제하는 기능을 합니다.
constructed language — 인공어. conlang으로 줄여 씁니다. 에스페란토, 톨킨의 엘프어, 나드샛이 모두 여기 속합니다. 자연 발생한 언어(natural language)와 대비됩니다.
dystopia — 디스토피아. utopia(유토피아)에 부정 접두사 dys-를 붙인 말입니다. 그리스어 topos(장소)에서 왔습니다. 형용사는 dystopian입니다.
free will — 자유의지. 이 소설의 중심 주제입니다. 국가가 알렉스에게서 폭력을 선택할 능력을 제거하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선(善)이 선인가를 묻습니다. 철학과 신학에서 계속 다뤄온 개념입니다.
subliminal — 잠재의식의, 의식 아래의. 라틴어 sub(아래) + limen(문지방)입니다. 의식이 감지하는 문턱 아래에서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subliminal advertising(잠재의식 광고)이 익숙한 용례입니다.
primer — 입문서, 기초 교본. 버지스가 이 소설을 “brainwashing primer”라고 표현했습니다. 발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영국 영어에서는 ‘프라이머’와 ‘프리머’가 갈리는데, 교본이라는 뜻일 때는 흔히 ‘프리머’로 읽습니다.
conditioning — 조건화.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에서 온 심리학 용어입니다. 이 소설에서 국가가 알렉스에게 적용하는 방법이 이것입니다. air conditioning의 conditioning과 같은 단어인데 뜻이 전혀 다릅니다.
지금 이 학교에 가려면
「영국 대학별 입결 통계 ⑤」에서 다룬 대로입니다.
맨체스터는 러셀그룹에서 지원자가 가장 많은 학교입니다. 2025년에 93,195명이 지원했고, 오퍼율은 약 56.1%입니다.
그런데 오퍼율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학과군별 합격률은 법학 7.7%부터 어학·지역학 16.4%까지 갈립니다. 실질 합격률은 11~12% 구간으로, KCL·UCL·임페리얼과 같은 자리입니다.
이 책과 이어지는 계열을 보면 이렇습니다.
| 학과군 | 합격률 |
|---|---|
| 역사·철학·종교학 | 14.5% |
| 어학·지역학 | 16.4% |
영문학과 어학 계열은 맨체스터에서 상대적으로 넓은 쪽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반복해서 나온 패턴입니다. 옥스퍼드 현대언어 43%, 케임브리지 고전학 47.5%, UCL 그리스·라틴학 88.0%. 인문·어학 계열은 어느 학교에서나 넓습니다. 그 과목을 준비해 지원하는 학생 자체가 적기 때문입니다.
일반 학업 요건은 GCSE 7~8등급 일곱 과목 이상 또는 A레벨 AAA 수준이며, 과정에 따라 필수 과목이 다릅니다.
개인진술서로 옮길 때
영문학이나 언어학 지원자에게 이 책은 좋은 소재입니다. 다만 각도가 중요합니다.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고 자유의지에 대해 생각했다”는 쓰지 마십시오. 가장 흔한 문단입니다.
대신 이런 각도가 있습니다. 나드샛은 독자가 배우게 되도록 설계된 언어인데, 그 설계가 실제로 작동하는가. 작동한다면 무엇 때문인가. 반복 빈도인가, 문맥의 밀도인가, 아니면 러시아어와 영어의 음운 구조 차이인가.
이건 실제로 연구된 주제이기도 합니다. 말뭉치 언어학 방법으로 나드샛의 특징을 분석한 논문이 있습니다. 핵심 나드샛 어휘가 텍스트를 지배하며, 다른 범주를 다 합친 것보다 열 배 가까이 자주 나온다는 분석입니다.
책 한 권을 읽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책이 만든 질문을 어디까지 따라갔는지가 평가 대상입니다. ②편, ③편, ④편과 같은 원칙입니다.
마지막으로
버지스는 죽을 때까지 자기를 작곡가로 여겼습니다. 소설은 나중에 온 것이었습니다.
맨체스터 음악과가 그를 받아줬다면 어땠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떨어진 그 지원 때문에 그가 영어라는 언어를 4년간 붙들고 있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20여 년 뒤, 그는 영어에 러시아어를 심어 독자가 모르는 사이에 배우게 만드는 소설을 썼습니다.
함께 읽기 [영국 대학별 입결 통계 ⑤] 맨체스터: 법학 7.7%, 어학 16.4%
이전 편 [책으로 보는 영국 대학 ④] 노예의 길 — LSE의 대표 저작은 케임브리지에서 쓰였습니다
다음 편 [책으로 보는 영국 대학 ⑥]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이 동화를 쓴 사람은 옥스퍼드 수학 강사였습니다
출처
- The International Anthony Burgess Foundation, “A Clockwork Orange”. https://www.anthonyburgess.org/a-clockwork-orange/
- Anthony Burgess, Wikipedia / Nadsat, Wikipedia
- Encyclopedia.com, A Clockwork Orange 항목
- 출판사 저자 소개 (Penguin, William Heinemann)
- 말뭉치 언어학 기반 나드샛 분석 논문 (Academia.edu 공개본)
- Anthony Burgess, A Clockwork Orange, William Heinemann, 1962
자료 구분
버지스의 학력, 음악과 지원 거절, 군 복무와 이후 경력은 위키피디아 항목과 출판사 저자 소개에 근거합니다. 나드샛의 구성과 집필 배경, 버지스가 밝힌 집필 의도, 1973년 낭독 녹음에 나타난 맨체스터 억양은 앤서니 버지스 재단 공식 사이트에 근거합니다. “잠재의식적 침투”는 소설 내 서술입니다. 나드샛 어휘 빈도 분석은 공개된 학술 논문에 근거하며 심사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argot, register, rhyming slang 등 언어학 용어 해설과 원서 읽기 방법에 관한 서술은 일반 배경지식과 제 판단입니다. 맨체스터 입학 통계와 요건은 「영국 대학별 입결 통계 ⑤」의 출처를 따릅니다. 한국어판 서지 정보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주의
이 작품에는 폭력과 성폭력 묘사가 포함돼 있습니다. 학생에게 권하기 전 내용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