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경제사상을 대표하는 책 한 권이 있습니다. LSE 경제학 교수가 썼습니다.
그런데 그 책은 케임브리지에서 쓰였습니다.
저자가 전시 케임브리지에서 소방 감시원으로 일하던 저녁 시간에 쓴 원고입니다.
이 편에서 다루는 영어 serfdom · central planning · collectivism · individualism · totalitarian · tyranny · liberal(영국식과 미국식) · rationing · fire warden · evacuate · memo · abridged
어떻게 이 책이 나왔는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1899년 빈에서 태어났습니다. 빈 대학교에서 법학과 경제학 박사를 받았고, 오스트리아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에게 배웠습니다.
1931년,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 경제학 교수가 됩니다. 이후 몇 년간 자본이론, 화폐이론, 비교경제체제에 관한 저작을 연달아 냈습니다.
『노예의 길』은 1940년부터 1943년 사이에 쓰였습니다. 저녁 시간이었습니다. 낮에는 전시 케임브리지에서 소방 감시원으로 일했기 때문입니다.
왜 LSE 교수가 케임브리지에 있었는가. 2차 대전 중 런던이 폭격을 받자 LSE는 케임브리지로 소개(疏開)했습니다. 런던 대학들이 전시에 지방으로 옮겨간 사례 중 하나입니다.
시작은 소박했습니다. LSE에 제출한 내부 메모였습니다. 당시 영국 지식인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견해, 즉 파시즘이 자본주의적이라는 통념에 하이에크가 반박한 문서였습니다. 그 메모가 잡지 기고문이 됐고, 기고문이 훨씬 큰 책의 구상으로 커졌습니다.
출판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세 출판사가 원고를 거절했습니다. 맥밀런, 리틀브라운, 하퍼 앤드 브라더스입니다. 맥밀런 측은 판매를 자신할 수 없으며 하이에크 교수가 영국과 미국 양쪽의 당대 사조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것 같다는 취지의 답을 보냈습니다.
1944년 3월 영국 라우틀리지에서 출간됐습니다. 그런데 책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시 종이 배급 때문에 소량만 인쇄됐기 때문입니다. 하이에크 본인이 이 책을 “구할 수 없는 책”이라고 불렀습니다.
전환점은 미국이었습니다. 1944년 9월 시카고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왔고, 1945년 4월 편집자 맥스 이스트먼의 주선으로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축약본을 실으면서 학계 밖 독자에게 도달했습니다. 이후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돼 200만 부 넘게 팔렸습니다.
무엇을 주장하는 책인가
핵심 주장은 이렇습니다. 중앙계획을 통해 정부가 경제적 의사결정을 통제하면 필연적으로 압제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와 고전적 자유주의를 버리면 자유의 상실, 억압적 사회, 독재자의 폭정, 그리고 개인의 예속으로 이어진다고 봤습니다.
당시 영국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파시즘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반동이라는 견해가 우세했습니다. 하이에크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파시즘, 나치즘, 국가사회주의가 중앙계획과 국가의 개인 지배 강화라는 공통의 뿌리를 갖는다는 것이 그의 논지입니다.
이론적 배경에는 사회주의 계산 논쟁이 있습니다. 미제스의 논증을 이어받아, 가격과 생산은 계획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생산량은 예상 가격에 근거하고,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결과이며, 수요와 공급은 어떤 개인이나 계획 기구도 알 수 없는 무수한 요인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의식이 1936년 런던경제클럽 회장 연설로 발표한 「경제학과 지식(Economics and Knowledge)」의 중심 주제였습니다. 인간이 가진 지식은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근대 경제학이 잊고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이 책은 지금도 논쟁적입니다. 하이에크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는 경제학자가 많고, 당대에도 그랬습니다. 그의 지적 라이벌이 케임브리지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였고,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은 하이에크와 군나르 뮈르달이 공동 수상했습니다. 학문적 입장이 상당히 다른 두 사람입니다.
이 글은 어느 쪽 입장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책이 어떤 조건에서 쓰였고 어떻게 읽혔는지를 아는 것은, 20세기 경제사상 논쟁의 지형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같은 학교, 같은 시기, 또 한 권
1947년, 하이에크는 스위스 몽펠르랭에 학자들을 모아 몽펠르랭 소사이어티를 만듭니다. 창립 멤버에는 그의 스승 미제스와, LSE의 절친한 동료였던 철학자 카를 포퍼가 있었습니다.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도 이 시기의 책입니다. 하이에크는 자기 책을 내기 전에 포퍼의 원고를 읽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물건이 남아 있습니다. 하이에크가 포퍼에게 보낸 『노예의 길』 초판에는 이런 헌사가 적혀 있습니다. “자유를 위해 함께 분투하는 이에게.”
포퍼는 나중에 자기 조수에게 이 책을 선물하며, 하이에크가 책 출간 당시 뉴질랜드에 있던 자신에게 보내준 것이며 아름다운 헌사가 담겨 있다고 적었습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도 책을 읽고 도덕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거의 전부에 동의하며,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 깊이 감동한 동의라고 썼습니다.
20세기 자유주의의 두 고전이 같은 학교, 같은 시기, 서로 원고를 돌려 읽던 두 동료에게서 나왔습니다.
여기서 짚고 갈 영어 — 정치경제의 어휘
serfdom — 농노제, 예속 상태. serf는 중세 봉건제의 농노입니다. 라틴어 servus(노예)에서 왔고 servant, service와 어원이 같습니다. 제목의 the road to serfdom은 ‘예속으로 가는 길’입니다. 책 제목은 19세기 프랑스 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이 쓴 ‘예속으로 가는 길’이라는 표현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central planning — 중앙계획. 국가가 생산과 분배를 계획하는 경제 체제입니다. planned economy(계획경제)와 함께 씁니다.
collectivism — 집단주의. 개인보다 집단의 이익을 앞세우는 입장입니다. 반대말이 individualism입니다. 한국어의 ‘집단주의’와 뉘앙스가 조금 다른데, 영어권 정치철학에서는 경제 체제를 가리키는 기술적 용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totalitarian — 전체주의의. total(전체)에서 왔고, 국가가 삶의 모든 영역을 통제하는 체제를 가리킵니다. authoritarian(권위주의의)과 구분해야 합니다. 권위주의는 정치적 반대를 억압하지만 사생활 전반까지 통제하지는 않습니다.
tyranny — 폭정, 압제. 그리스어 tyrannos(참주)에서 왔습니다. tyrant(폭군)의 명사형입니다.
liberal — 이 단어가 이 편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영국과 유럽에서 liberal은 기본적으로 자유시장과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입장을 가리킵니다. 하이에크가 자기를 설명할 때 쓴 classical liberal이 그것입니다.
미국에서 liberal은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지지하는 좌파 성향을 뜻합니다.
같은 단어가 대서양 양쪽에서 반대 방향을 가리킵니다. 영국 신문을 읽을 때 이 차이를 모르면 문장 전체를 반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미국 드라마와 미국 뉴스로 영어를 익힌 학생이 특히 자주 걸리는 지점입니다.
rationing — 배급제. 전시에 물자를 나누어 주는 제도입니다. 이 책의 초판이 소량만 인쇄된 이유가 paper rationing(종이 배급)이었습니다. ration은 명사로 ‘배급량’, 동사로 ‘배급하다’입니다.
fire warden — 소방 감시원. 공습 중 소이탄 화재를 감시하고 초기 진화하는 역할입니다. 전시 영국의 민간 방위 조직에서 warden은 구역 담당자를 뜻했습니다. 지금도 traffic warden(주차 단속원), warden(기숙사 사감)처럼 ‘감독·관리하는 사람’으로 쓰입니다.
evacuate — 소개(疏開)하다, 대피시키다. 전시에 도시의 사람이나 기관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evacuation, evacuee(피난민)로 확장됩니다. LSE가 케임브리지로 옮겨간 것이 evacuation입니다.
memo — memorandum의 줄임말. 조직 내부에 회람하는 문서입니다. 이 책의 출발점이 메모였습니다. 논문도 책도 아닌 내부 문서 하나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이 이 단어의 무게를 보여줍니다.
abridged — 축약된. abridged edition(축약본), unabridged(완역·무삭제)로 씁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실은 것이 abridged version이었습니다. 원서를 고를 때 이 표시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책을 학생에게 어떻게 권할 것인가
경제·정치·PPE 지원자에게 유용합니다. 다만 읽는 방식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 책을 결론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논쟁의 한쪽 입장으로 읽어야 합니다.
영국 대학의 경제·정치 계열 면접에서 요구되는 것은 정해진 답이 아니라, 어떤 주장이 어떤 전제 위에 서 있는지를 파악하는 능력입니다. 앞선 옥스퍼드 시리즈에서 정리한 대로, 양쪽을 공평하게 늘어놓기만 하는 답변은 아무 정보도 주지 못합니다. 입장을 정하되 그 입장의 근거와 한계를 함께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책은 그 연습에 적합합니다. 논지가 선명하고, 반박도 풍부하게 축적돼 있기 때문입니다. 케인스주의 경제학, 전후 복지국가의 실제 경로, 북유럽 사례 등이 모두 이 책에 대한 반론의 자료가 됩니다.
읽는 순서
전체가 부담이라면 『리더스 다이제스트』 축약본이 지금도 널리 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축약본은 논증의 단계를 상당히 생략하므로, 이 책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파악하는 용도로만 쓰고 인용은 원문에서 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개인진술서로 옮길 때
“하이에크를 읽고 자유시장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문장은 쓰지 마십시오. 가장 흔하고 가장 약한 문단입니다.
대신 이런 각도가 있습니다. 하이에크가 계획경제를 비판한 핵심 근거는 도덕이 아니라 지식의 문제였다는 점입니다. 계획 기구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필요한 정보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라는 논증입니다. 그 논증이 정보 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유효한지가 실제로 열려 있는 질문입니다.
책이 만든 질문을 어디까지 따라갔는지가 평가 대상입니다. ②편, ③편과 같은 원칙입니다.
지금 이 학교에 가려면
「영국 대학별 입결 통계 ④」에서 다룬 대로입니다.
LSE의 2025년 최종 합격률은 6.6%입니다. 같은 해 옥스퍼드 14.2%, 케임브리지 16.3%보다 낮습니다. 자리 하나를 두고 약 열다섯 명이 경쟁합니다.
이 책과 이어지는 과정들의 숫자는 이렇습니다. 경제 합격률 7.5%, PPE 4.1%, 정치·국제관계 3.0%입니다.
LSE는 어떤 학위 과정에서도 면접을 보지 않습니다. 서류와 시험이 전부입니다. 경제학과 소속 과정은 TMUA가 필수이고, 법학은 LNAT를 요구합니다.
표준 오퍼는 A레벨 A*AA에서 AAB, IB 37~39점에 HL 666 또는 766입니다. 경제는 수학 A*를 포함한 A*AA입니다.
과목 조합 규칙을 반드시 확인하십시오. 수학과 심화수학을 함께 이수한 경우, 경제·법학·경영을 비롯한 상당수 과정이 에세이 기반 과목 (Essay-based subjects)을 하나 더할 것을 요구합니다. 한국 학생이 흔히 고르는 수학·심화수학·경제 조합이 여기 걸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이에크가 이 책을 쓴 조건을 다시 보십시오.
전시입니다. 자기 학교는 런던을 떠나 케임브리지에 있습니다. 낮에는 소방 감시원으로 일합니다. 원고는 저녁에 씁니다. 출판사 셋이 거절합니다. 나온 책은 종이가 없어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 책이 20개 언어로 200만 부가 팔렸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다루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습니다. 스물여덟에 학부를 시작한 사람, 포목상 견습에서 장학금으로 대학에 간 사람, 저녁 시간에 쓴 원고로 사상사를 바꾼 사람입니다.
입결 통계는 한 해의 사진이고, 이 사람들의 이력은 그 사진 바깥에 있습니다.
함께 읽기 [영국 대학별 입결 통계 ④] LSE: 옥스퍼드보다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가 런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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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LSE History Blog, Lachezar Grudev, “Friedrich A. von Hayek (1899–1992) at LSE”. https://blogs.lse.ac.uk/lsehistory/2024/06/26/friedrich-a-von-hayek-1899-1992-at-lse
- Mont Pelerin Society, F.A. Hayek 소개
- Institute of Economic Affairs, “75 years since The Road to Serfdom”
- Raptis Rare Books, 하이에크가 포퍼에게 증정한 초판 및 헌사 기록
- The Road to Serfdom 서지 항목 (Routledge, 1944)
자료 구분
하이에크의 LSE 재직과 학문적 배경, 사회주의 계산 논쟁, 「경제학과 지식」은 LSE 역사 블로그와 몽펠르랭 소사이어티 자료에 근거합니다. 케임브리지 소방 감시원 시절의 집필과 LSE 내부 메모에서 출발한 경위, 미국 출판사들의 거절은 각각 경제문제연구소 자료와 관련 기록에 근거합니다. 종이 배급과 『리더스 다이제스트』 축약본, 판매 부수와 번역 언어 수는 서지 항목 기준입니다. 포퍼와의 관계 및 헌사 내용은 희귀본 거래 기록에 근거하며, 원본을 직접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liberal의 영미 용법 차이, serfdom과 warden의 어원 설명은 일반 배경지식입니다. 이 책의 주장에 대한 평가는 이 글에서 내리지 않았으며, 논쟁 상황만 소개했습니다. LSE 입학 통계와 요건은 「영국 대학별 입결 통계 ④」의 출처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