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네 편, 캠브리지 네 편을 썼습니다. 마지막은 런던입니다.
그런데 이 편은 앞선 여덟 편과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런던 대학을 다룬 영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없는 게 아닙니다. 나오기는 아주 많이 나옵니다. 다만 자기 이름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학교마다 안 나오는 방식이 다릅니다. 이 차이가 의외로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이 시리즈는 두 편입니다 ① 없는 방식들 (이 글) — 런던 대학이 영화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 ② 어휘편 — 런던 대학에서 실제로 쓰는 영국 영어
없는 방식들
임페리얼 — 익명으로 나옵니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2014)에서 해리 하트가 아놀드 교수와 대면하는 장면이 임페리얼에서 촬영됐습니다. 『원초적 본능 2』도 이곳에서 찍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넷플릭스 『록우드 앤 코』는 버크셔에 있는 임페리얼의 실우드 파크 캠퍼스 저택을 유령의 집으로 썼습니다.
그런데 극 중에서 그곳이 임페리얼이라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냥 계단이고 복도입니다. 관객이 알 방법이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접점은 오히려 다른 데 있습니다. 『보헤미안 랩소디』(2018)에서 프레디가 브라이언 메이를 두고, 밴드가 안 됐으면 아무도 안 읽을 천체물리학 논문을 쓴 ‘메이 박사’가 됐을 거라고 농담합니다. 브라이언 메이는 실제로 임페리얼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고, 1970년부터 천체물리학 박사과정을 밟다가 중단했다가, 30여 년 뒤 논문을 완성해 학위를 받았습니다.
대사 한 줄 뒤에 학교가 있습니다. 화면에는 없습니다.
UCL — 변장한 채로 나옵니다
UCL은 규모가 다릅니다. 위키백과에 “Filming at University College London”이라는 항목이 따로 있습니다.
- 『글래디에이터』(2000) — 프론트 쿼드를 고대 로마의 모델 중 하나로
- 『미이라 2』(2001) — 주로 프론트 쿼드를 대영박물관으로
- 『썬더버드』(2004) — 프론트 쿼드와 윌킨스 빌딩을 트라팔가 광장의 ‘런던 은행’으로
- 『배트맨 비긴즈』(2005) — DMS 왓슨 도서관을 고담 인쇄실로, 메더워 빌딩 외관을 경찰 본부 일부로
- 『스타터 포 텐』(2006) — 캠퍼스 곳곳을 브리스톨 대학으로
- 『어톤먼트』(2007) — 물리학 마당을 부상병 후송 구역으로
- 『인셉션』(2010) — 프론트 쿼드, 구스타브 턱 강의실, 메인 도서관
- 『커런트 워』(2017) — 포르티코를 뉴욕증권거래소 입구로
더 오래된 것들도 있습니다. 『닥터 인 더 하우스』(1954)와 『39계단』(1959)은 UCL을 병원으로 썼고, 『아이즈 와이드 셧』(1999)은 교내 진료소를 톰 크루즈 캐릭터가 찾는 클리닉으로 썼습니다. 볼리우드 영화 『줌 바라바르 줌』(2007)과 『데시 보이즈』(2011)는 포르티코 계단에서 촬영했습니다.
목록을 다시 보면 규칙이 보입니다. 로마, 대영박물관, 은행, 고담, 병원, 증권거래소, 그리고 다른 대학. UCL이 UCL로 나온 적이 거의 없습니다. 1991년작 『크레인의 잃어버린 언어』가 UCL 소속 가공 인물을 등장시킨 정도가 예외입니다.
특히 『스타터 포 텐』은 흥미롭습니다. 대학이 다른 대학인 척했습니다.
『썬더버드』에는 우연한 농담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프론트 쿼드와 윌킨스 빌딩을 트라팔가 광장 북쪽의 은행으로 썼는데, 실제로 그 자리에 있는 건물은 내셔널 갤러리이고, 그 건물 역시 같은 건축가 윌리엄 윌킨스가 설계했습니다. 윌킨스의 건물이 윌킨스의 건물을 대신한 셈입니다.
LSE — 이름만 나옵니다
LSE는 반대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이력으로 등장합니다.
『잭 라이언: 코드네임 셰도우』(2014)에서 잭 라이언은 LSE 졸업생으로 설정됐고, 올드 빌딩에서 걸어 나오는 졸업 장면을 실제로 찍었습니다. 이 대목에 대한 LSE 측의 논평이 담담합니다. 안타깝게도 이후 줄거리는 그의 LSE 학업과 별 상관이 없다고요.
『매드맨』 시즌3에서는 런던에서 온 가이 매켄드릭이 옥스퍼드와 LSE 졸업생으로 소개됩니다. 뉴욕 지사를 맡기로 돼 있었는데 사무실 파티에서 비서가 몰던 잔디깎이에 치입니다. 『더 크라운』에는 LSE에서 공부한 필립공 관련 장면이 나오고, 『스타게이트 SG-1』의 중국 대표 셴 샤오이도 LSE 졸업생 설정입니다.
예외가 하나 있습니다. 1968년 흑백 독립영화 『더 커미티』는 LSE 쇼 도서관이 주요 배경입니다. 각본을 쓴 사람이 LSE 소속 연구원이었고, 사운드트랙은 핑크 플로이드가 맡았습니다.
킹스칼리지런던 — 도서관이 런던탑이 됩니다
킹스는 UCL과 같은 방식입니다. 건물이 다른 것으로 변장합니다.
무대는 스트랜드 캠퍼스의 **모건 도서관(Maughan Library)**입니다. 원래 19세기 공문서보관소(Public Record Office) 건물이라 학교 건물처럼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찾아옵니다.
『쟈니 잉글리쉬』(2003)는 이곳을 런던탑으로 썼습니다. 『에놀라 홈즈』(2020)에도 외관이 나옵니다.
여기서 발음 하나. Maughan은 ‘모건’이 아니라 ‘몬’에 가깝게 읽습니다. 작가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과 같은 계열의 철자입니다. 옥스퍼드 편의 Balliol, 캠브리지 편의 Caius와 같은 함정이 런던에도 있습니다.
정리하면 킹스는 UCL과 한 묶음입니다. 런던대학교 소속이면서, 오래된 건물을 가졌고, 그 건물이 학교가 아닌 무언가로 계속 쓰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임페리얼은 이름 없이 장소만, UCL과 킹스는 다른 것으로 변장한 장소로, LSE는 장소 없이 이름만. 네 학교 다 자기 자신으로는 거의 나오지 않는데, 없는 방식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무엇이 남는가
지금까지 확인한 것을 정리합니다.
옥스퍼드 편에서 확인한 것은 면접과 수업에 관한 오해였습니다. 3단계 면접도 압박 테스트도 없고, 어울리는 사람인지를 심사하지도 않으며, 에세이를 소리 내어 읽는 수업은 사실상 사라졌고, 부모를 아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캠브리지 편에서 확인한 것은 화면 자체를 믿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달리기 장면은 다른 학교에서 찍혔고, 호킹의 칼리지는 대역이었고, 라마누잔은 실제보다 신비하게 그려졌습니다.
런던 편에서 확인한 것은 조금 다릅니다. 여기에는 애초에 배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래서, 잘못 배울 것도 없습니다.
옥스브리지 지망생은 영화가 심어놓은 이미지를 먼저 걷어내야 합니다. 런던 대학 지망생에게는 걷어낼 이미지 자체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공식 자료로 시작하면 됩니다. 불리한 조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걷어내고 나면 남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런던 대학은 실제로 어떤 곳인가.
그 답은 화면이 아니라 단어에 있습니다. 이어지는 ②편에서 런던 대학에서 실제로 쓰는 말들을 정리합니다. 옥스브리지의 말이 제도의 말이라면, 런던의 말은 도시의 말입니다. 그 차이가 곧 생활의 차이입니다.
지원자가 고르는 것은 순위가 아닙니다. 어떤 종류의 3년을 보낼 것인가입니다. 영화는 그걸 알려주지 않습니다.
시리즈 전체 목차
영화 속 옥스퍼드 ① 솔트번 ② 마이 옥스퍼드 이어 ③ 마이 폴트: 런던 ④ 맥스턴 홀
영화 속 캠브리지 ① 불의 전차 ② 사랑에 대한 모든 것 ③ 무한대를 본 남자 ④ 어휘편
영화 속 런던 대학 ① 없는 방식들 (이 글) ② 어휘편 — 런던 대학에서 실제로 쓰는 말
출처
- Wikipedia, “Filming at University College London”
- Wikipedia, “Member institutions of the University of London”
- LSE History Blog, “LSE on the big and the small screen”
- Unifresher, “The best movies filmed on university campuses in the UK”
- Times Higher Education, “Imperial’s plan to axe its old ties” (2005)
- Atlas of Wonders, “Where was Lockwood & Co filmed?”
- The Tab, “All the UK universities that starred as filming locations in movies over the years” (2025)
자료 구분 UCL의 촬영 목록과 각 장면의 용도는 위키백과 해당 항목에 근거합니다. 임페리얼이 1908년 런던대학교에 들어와 2007년 탈퇴했다는 점은 런던대학교 소속 기관 목록에, 탈퇴 배경은 당시 언론 보도에 근거합니다. LSE 관련 작품 목록과 『잭 라이언』에 대한 논평은 LSE 도서관이 운영하는 역사 블로그에 근거합니다. 임페리얼의 『킹스맨』 촬영, 킹스칼리지런던 모건 도서관의 『쟈니 잉글리쉬』·『에놀라 홈즈』 촬영, 크리스토퍼 놀란이 UCL 동문이라는 점은 학생 매체의 로케이션 정리 자료에 근거하며 별도 확인의 여지가 있습니다. Maughan의 발음 안내는 일반 배경지식입니다.
어휘 해설은 ②편으로 옮겼습니다.
주의 런던대학교 소속 기관 구성은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었습니다. 지원 시점의 소속 관계와 학위 수여 주체는 각 대학 공식 안내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