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미디어 확산 영상에 “조국이 나를 용서해줬구나”… 실제 기록은 달라
국립원예특작과학원·국가기록원 모두 “인정했다”로 기록… 두 글자가 바꾼 것
본인은 친일인명사전·정부 명단 어디에도 없어

육종학자 우장춘이 다시 화제에 올랐다. 이달 들어 그의 생애를 다룬 짧은 영상이 소셜미디어에서 확산되며 수백 건의 반응이 달렸다. 그 반응들이 공유하는 문장이 하나 있다.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 정부 포장을 받은 자리에서 그가 “드디어 조국이 나를 용서해줬구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수천 건의 공감을 얻은 게시물이 이 표현을 쓰고 있고, 그 아래로 이 정도면 용서가 가능하다거나 이 정도는 해야 용서받는 것이라는 취지의 반응이 길게 이어진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1959년 8월 7일 서울 국립의료원 병실에서 이근식 농림부 장관은 병상에 누운 우장춘에게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에 이어 두 번째였다. 메달을 목에 건 그는 눈물을 흘리며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고 말했다. 사흘 뒤인 8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우장춘이 원장을 지낸 중앙원예기술원의 후신인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은 기관 공식 페이지에 이 문장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유족이 기증한 문화포장증을 보존 중인 국가기록원의 기록물 소개 자료 역시 동일하다. 용서가 아니라 인정이다.
인정과 용서는 두 글자 차이지만 문장이 전제하는 사실관계가 정반대다. 인정은 공적을 전제한다. 용서는 죄를 전제한다. 우장춘이 실제로 쓴 단어는 전자이고, 그를 기리는 대중이 기억하는 단어는 후자다.

본인의 친일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전제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우장춘 본인의 친일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오르지 않았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 것은 아버지 우범선이다.
그가 일제강점기 대부분을 일본 본토에서 일본 농림성 소속 연구자로 보낸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고, 조선총독부 관료도 식민통치기구의 일원도 아니었다. 친일인명사전의 수록 기준은 매국 행위에 직접 가담한 민족반역자와, 식민통치기구의 일원으로 식민지배의 하수인이 되거나 침략전쟁을 미화 선전한 부일협력자로 규정돼 있다.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은 쪽이었다. 박사학위를 받고도 승진하지 못했고,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면 승진시켜주겠다는 회유를 거절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일본 연구기관에 취직한 것과,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인을 상대로 부역한 것은 같은 범주에 놓일 수 없다.
아버지의 죄, 아들의 이력
우장춘은 1898년 4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895년 을미사변 당시 조선군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우범선이다. 이듬해 아관파천으로 정세가 뒤집히자 일본으로 달아났고, 일본 여성 사카이 나카와 사이에서 우장춘을 낳았다. 1903년 대한제국 군인 출신 고영근에게 암살당했다. 우장춘은 여섯 살이었다.
이후의 성장 과정은 궁핍했다. 어머니 혼자 두 아들을 키우기 어려워 우장춘은 한동안 보육원에 맡겨졌다. 그가 평생 감자를 먹지 않은 것도 그 시절 때문이었다. 딸이 이유를 묻자 평생 먹을 양을 그때 다 먹어 보는 것조차 싫어졌으니 이것만은 용서해달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학력에서도 제약이 있었다. 그는 교토제국대학 공학부 진학을 원했으나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도쿄제국대학 부설 전문학교 농학실과에 들어갔다. 정규 학부가 아니다. 1919년 졸업 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취직했고, 1935년 배추속 식물의 게놈 분석 결과를 발표한 뒤 이듬해 5월 4일 도쿄제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고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승진하지 못했다.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면 승진시켜주겠다는 회유가 있었으나 거절했다. 호적상 이름은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였지만 논문 서명은 ‘Nagaharu U’였다. 우씨들이 통상 쓰는 ‘Woo’가 아니라 알파벳 한 글자 ‘U’를 택했다.
세계 육종학 교과서에 남은 ‘우의 삼각형’
우장춘의 학문적 업적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과 다르다. 그는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하지 않았다. 씨 없는 수박은 1943년 교토대 기하라 히토시(木原均)가 먼저 만들었고, 우장춘은 육종 기술이 무엇인지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국에서 시연 재배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오해는 지금까지 교과서 수준의 상식으로 굳어져 있으며, 반대로 일부 온라인 문서는 이를 근거로 그를 허위 주장을 한 인물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실제 업적은 1935년의 ‘종의 합성’ 이론이다. 그는 염색체 10개인 배추와 9개인 양배추를 교배해 염색체 19개인 유채를 실험적으로 만들어냈다. 흑겨자와 배추 사이에서 갓을, 흑겨자와 양배추 사이에서 에티오피아 겨자를 얻는 데도 성공했다. 같은 속의 서로 다른 종을 교배해 새로운 종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실험으로 입증한 것이다. 당시 학계 정설은 종은 자연도태의 결과이며 같은 종끼리만 교배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 관계를 도식화한 것이 ‘우의 삼각형(U’s Triangle)’이다. 다윈 진화론을 수정 보완한 업적으로 평가받으며 현대 육종학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후속 분자생물학 연구로 타당성이 재확인됐고, 2018년에는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연구진이 유전체 정보를 통해 이를 다시 입증해 국제 학술지에 발표했다. 일본 도쿄대 농학부는 2025년 9월 17일 ‘우의 삼각형 구축 90주년 기념 국제 심포지엄’을 열었다.

세계 학계에 이름은 남고 국적은 흐려졌다
우의 삼각형은 오늘날에도 배추속 연구의 표준 인용문헌이다. 1935년 일본식물학잡지에 실린 논문 「Genome analysis in Brassica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experimental formation of B. napus and peculiar mode of fertilization」은 국제 학술지 논문과 육종학 문헌, 미국 특허 명세서의 도면 설명에까지 인용된다. 일본에서도 평가가 유지되고 있다. 도쿄대 농학부는 2025년 9월 17일 우의 삼각형 구축 9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 심포지엄을 열었다.
다만 그 이름이 남은 방식은 온전하지 않다. 그는 호적명 스나가 나가하루를 두고도 논문에는 한국 성 우(禹)를 알파벳 한 글자 U로 표기했다. 통상 쓰이는 ‘Woo’가 아니라 한 글자를 택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국제 학술 인용에서는 이 표기가 자주 뒤집힌다. 상당수 문헌이 인용 표기를 ‘Nagaharu, 1935’로 적는다. 성이 아니라 이름을 성의 자리에 놓은 것이다. 그가 끝내 지키려 한 한 글자가 인용 관행 속에서 밀려난 셈이다.
국적 표기도 일정하지 않다. 영어권 백과사전은 그를 한국계 일본인 식물학자로 소개하지만, 일부 문헌은 일본인 식물학자로 표기한다. 1930년대 세포유전학 연구를 다루면서 일본 연구자들과 묶어 서술하는 경우도 있다.
온라인에서는 전 세계 생물학 교재에 ‘닥터 우’로 실려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이라는 서술이 돌고 있다. 앞부분은 대체로 사실에 가깝고 뒷부분은 과장이다. 정확히는 이름은 남았으나 국적은 자주 지워진 상태로 남아 있다.
국내에서는 짓지 않은 업적으로 기억되고, 국외에서는 지은 업적이 다른 나라의 것으로 흘러간다. 우장춘은 양쪽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워지고 있다.
광복 후 한국 농촌은 종자 공급이 끊겨 위기를 맞았다. 해마다 3000가마씩 일본산 종자를 들여와 파종하던 채소 농가의 타격이 가장 컸다. 배추와 무 종자를 밀수해서라도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장춘과 함께 근무했던 김종이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우장춘뿐이라고 제안했다. 국모 시해범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반대 의견도 나왔으나 사정이 절박해 초빙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우장춘박사귀국추진위원회가 결성돼 모금이 이뤄졌고, 1949년 4월 30일 한국농업과학연구소가 창설됐다.
일본 정부는 그의 출국을 막았다. 우장춘은 강제퇴거 대상 외국인을 구금하는 오무라수용소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한국에서 보내온 호적등본을 제시하고 출국을 요청했다. 아내와 2남 4녀는 일본에 남았다. 안정된 지위와 훨씬 나은 연구 여건을 두고 내린 결정이었다.
1950년 3월 8일 부산항에 내렸다. 열흘 뒤 동래원예고등학교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한복 차림으로 단상에 올라 지금까지 어머니 나라를 위해 힘썼으니 이제는 아버지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쓴 언어는 일본어였다. 그는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
귀국추진위가 가족 생활비 명목으로 보낸 100만 엔은 육종 서적과 실험 기자재, 종자를 사는 데 전액 썼다. 이후 9년 5개월 동안 배추와 무 우량종을 개발해 채소 종자 자급을 이뤄냈고, 대관령시험장에서 개발한 무병 씨감자는 강원도 감자의 모태가 됐다. 제주에는 유채와 감귤을 보급했다.
1953년 6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한국 정부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우려해 출국을 불허했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그는 연구소 강당에 분향소를 차렸고, 각계에서 들어온 조위금으로 우물을 파 어머니의 젖줄 같은 샘이라는 뜻으로 자유천(慈乳泉)이라 이름 붙였다. 유적은 부산 동래구 우장춘기념관 앞에 남아 있다.

대관령의 씨감자, 70년 뒤 아프리카로
우장춘이 남긴 것 가운데 오늘날까지 가장 멀리 간 것은 감자다. 그가 대관령 시험장에서 개발한 무병 씨감자는 바이러스에 취약해 한번 번지면 전멸하던 감자에 저항성을 부여했고, 이른바 강원도 감자의 모태가 됐다.
같은 대관령에서 지금은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고령지농업연구소가 씨감자 연구를 맡고 있다. 이 기관은 무병묘를 이용한 씨감자 수경재배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실용화했다. 정부 자료에 따르면 독일과 일본 같은 농업 선진국은 물론 국제감자연구소도 이 기술을 도입해 쓰고 있다.
기술은 밖으로 나갔다. 농촌진흥청은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알제리에 씨감자 생산 기술을 지원해 자체 생산 체계를 갖추도록 했고, 이 사업은 2014년 국가 해외기술지원사업 우수사업으로 선정됐다. 2009년 시작된 해외농업기술개발사업(KOPIA)은 현재 아프리카에서 가나, 감비아, 기니, 세네갈, 에티오피아, 우간다, 짐바브웨, 카메룬, 케냐 아홉 개국에 센터를 두고 있다.
성과는 수치로 나타난다. 농촌진흥청은 케냐에서 바이러스가 없는 건전 씨감자를 보급해 감자 농가의 생산성이 두 배로 늘었다고 밝혔다. 케냐 코피아센터가 조성한 감자 시범마을의 경우 생산량이 헥타르당 3.2톤에서 9.2톤으로 세 배 가까이 증가했다. 도미니카공화국에서는 헥타르당 18톤이던 생산성이 25톤으로 올라갔다. 베트남과 파키스탄, 그리고 감자 원산지인 에콰도르와 볼리비아, 파라과이에도 한국형 씨감자 기술이 지원되고 있다.
한국은 1950년대에 공적개발원조를 받던 나라였다. 곡식이 모자라 감자로 끼니를 대신하던 시절이다. 우장춘이 육종 서적과 실험 기자재, 종자를 배에 싣고 부산항에 내린 것이 바로 그 1950년이었다. 종자를 들여와야 했던 나라가 이제 종자 기술을 내보내는 나라가 됐다.
우장춘 본인이 속죄의 언어를 쓴 것은 사실이다. 어머니 나라와 아버지 나라를 대비시킨 환영식 발언이 그렇다. 다만 그것은 그가 스스로 짊어진 몫이었다. 사회가 후손에게 부과하는 채무와, 개인이 자발적으로 떠안은 부채는 성격이 다르다. 앞의 것은 연좌제이고, 뒤의 것은 선택이다.
온라인의 반응은 이 지점에서 갈라진다. 다수는 용서와 속죄의 언어를 쓴다. 조상의 업을 갚았다, 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덮을 만한 업적이다, 이 정도면 용서가 가능하다는 식이다. 소수는 되묻는다. 우장춘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용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느냐고, 용서보다 감사가 앞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후자가 그가 병상에서 실제로 남긴 단어에 더 가깝다. 그는 조국이 나를 용서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인정했다고 말했다. 문화포장은 사면장이 아니라 공적에 대한 포상이었다. 정부가 준 것도 용서가 아니었고, 그가 받은 것도 용서가 아니었다.
한편 확인되지 않은 서술도 함께 퍼지고 있다. 일본에 남았다면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검증할 수 없는 가정이며, 사각 수박 개발이나 아프리카 다수 국가를 구했다는 서술 역시 근거를 확인할 수 없다. 화투놀이 고이코이를 응용해 고스톱을 창안했다는 이야기는 일화 수준에서 전해지는 내용으로, 학술적으로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을 개화파 관료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온라인에 일부 제기된다. 그러나 을미사변 가담은 반민족행위로 정리된 사안이며, 그 평가와 아들의 업적 평가는 애초에 별개의 사안이다. 아버지의 행위를 아들의 공적으로 상쇄하려는 시도와, 아들에게 아버지의 책임을 묻는 시도는 방향만 다를 뿐 같은 논리 위에 서 있다.
우장춘은 1954년 초대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됐고, 1957년 제1회 부산시 문화상 과학상을 받았으며, 2017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됐다. 묘소는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여기산에 있다. 야생동물 및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일반인의 접근은 제한돼 있다.
우장춘기념사업회는 2025년 10월 1일 창립총회를 거쳐 2026년 3월 31일 법인 설립 인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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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의 이름과 함께 육종학이라는 분야에 관심이 옮겨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학부 단계에서 육종학이라는 이름을 단 학과는 국내외 모두 드물다. 통상 농업생명과학, 원예학, 작물학, 식물자원학, 식물생명공학 계열 학부로 진학한 뒤 대학원에서 육종학을 전공하는 구조다. 현장 육종가로 채용되려면 대체로 석사 이상이 요구되며, 연구 책임자급은 박사 학위가 사실상 전제된다.
최근 육종학의 성격은 크게 달라졌다. 교배와 선발에 더해 유전체 분석과 통계, 프로그래밍이 핵심 도구가 됐다. 국내 대학원 육종학 교과목에도 R과 파이썬을 이용한 양적형질 분석, 집단유전학 분석, RNA 시퀀싱 분석이 정규 과정으로 편성돼 있다. 생물학뿐 아니라 통계와 데이터 처리 역량이 함께 요구되는 분야로 이동한 것이다.
해외 진학을 고려한다면 네덜란드 바헤닝언대학교(WUR)가 우선 검토 대상이다. QS 세계대학순위 2024년 농림 분야 1위로, 식물육종(Plant Breeding)이라는 이름을 단 석사 과정을 별도로 운영한다. 현직자를 위한 온라인 석사 과정도 함께 두고 있다. 미국에서는 위스콘신대학교 매디슨이 식물육종·식물유전학 석사 과정을 운영하며 육종 대학원 규모와 프로그램 다양성에서 앞선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은 이 분야에서 여전히 존재감이 있다. 종자기업 사카타는 아시아 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세계 10대 종자기업권에 들었으며, 다키이 역시 세계 잎채소 종자 주요 업체로 꼽힌다. 우장춘이 1937년 옮겨간 곳이 바로 다키이 종묘였고, 그는 초대 나가오카 농장장을 맡았다. 다만 네덜란드 기업들도 세계 채소 종자 시장 상위권을 형성하고 있어, 산업 기준으로 일본이 독주하는 구도는 아니다.
국내에는 1969년 창립한 한국육종학회가 있으며 대학과 연구소, 종자기업 소속 회원 약 1000명이 활동하고 있다. 국문 학술지 한국육종학회지와 영문 학술지 Plant Breeding and Biotechnology를 발간한다.
우장춘 본인의 경로도 참고할 만하다. 그는 육종학과를 나오지 않았다. 도쿄제대 부설 전문학교 농학실과를 마치고 농림성 연구직으로 일하면서 연구를 이어갔고, 학위는 나중에 논문으로 받았다. 학부 전공 하나로 진로가 결정되는 분야가 아니라는 점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우장춘박사 — 박사의 영향: 우장춘의 타계와 영향」, https://www.nihhs.go.kr/usr/persnal/Drjc.do?t_cd=400
- 국가기록원 기록온, 「우장춘 박사 기록물 영구 보존되다」, https://theme.archives.go.kr/next/archivesOn/archivesOnView.do?vid=000064
- 국가기록원, 「우장춘」 기록정보 콘텐츠, https://archives.go.kr/next/new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4524
- 이희용, 「’종의 합성’으로 진화론 수정한 천재, 고스톱 창안까지」, 오마이뉴스, 2026.8.10,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257327
- 「[역사속 부산사람] ② 우장춘(1898~1959)」, 부산일보, 2003.4.16,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030416000135
- 방재욱, 「우장춘 박사의 삼각형 : U’s Triangle」, 자유칼럼, 2015.8.18, https://www.freecolum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8
- 「재미있는 생명이야기 — U’s Triangle 이야기」,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기술과혁신 웹진, 2019.10, http://webzine.koita.or.kr/201910-culture/
- 「우장춘 박사의 ‘우의삼각형’ 이론, 유전체 빅데이터로 증명 성공」, 한국농어촌방송, 2018.5.28, http://www.newskr.kr/news/articleView.html?idxno=1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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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종수, 「글로벌 종자 산업」,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세계농업 제139호, https://repository.krei.re.kr/handle/2018.oak/19910
- 주히로시마 대한민국 총영사관, 「불행한 한일역사 속에서 우범선·우장춘 두 부자가 걸어온 길」, 2009.8.25, https://overseas.mofa.go.kr/jp-hiroshima-ko/brd/m_20715/view.do?seq=7068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