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음 14개, 모음 10개.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글은 단 24개의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580여 년 전 만들어진 이 문자가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의 시대에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적은 기호를 규칙대로 조합해 무한한 표현을 만들어내는 그 설계 방식에 있다.
한글날을 막 지난 지금, 해외 유학을 준비하며 영어와 씨름하는 학생들에게도 이 24개의 글자는 생각해볼 거리를 던진다.
“날마다 씀에 편하게”
『훈민정음』 서문은 세종이 글자를 만든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핵심은 두 가지다. 누구나 쉽게 배울 것(易習), 그리고 일상에서 편하게 쓸 것(便於日用). 특정 계층의 학문이 아니라 매일 쓰는 도구를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580년이 지난 지금, 그 ‘날마다 쓰는 일’은 종이 위가 아니라 화면 위에서, 그리고 인공지능과의 대화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28자에서 24자로
세종이 처음 만든 글자는 24자가 아니라 28자였다. 1443년 창제되어 1446년 『훈민정음』으로 반포될 당시 자음 17자, 모음 11자였다.
이 가운데 여린히읗(ㆆ), 반치음(ㅿ), 옛이응(ㆁ), 아래아(ㆍ) 네 글자가 소리의 변화와 함께 쓰이지 않게 되었다. 1909년 국문연구소 의정안은 아래아를 남긴 25자 체계였으나, 이를 뺀 24자 체계가 1933년 조선어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 최종 확정되었다.
흥미롭게도 사라진 아래아(ㆍ)의 ‘점’은 오늘날 휴대폰 천지인 자판에서 다시 살아났다. 문자에서는 물러났지만, 모음을 만드는 원리로서는 지금도 매일 쓰이고 있는 셈이다.
24개로 11,172개를 만드는 원리
한글은 음소 문자이면서도 글자를 음절 단위로 모아 쓴다. ‘꿀벌’을 ㄲㅜㄹㅂㅓㄹ로 늘어놓지 않고 초성·중성·받침 세 자리에 맞춰 한 덩어리로 쓰는 방식이다.
24개의 기본 자모를 겹치고 합치면 초성 19개, 중성 21개, 받침 27개(받침 없음을 포함하면 28가지)가 된다. 이를 곱하면 19 × 21 × 28 = 11,172개의 음절이 나온다. 국제 문자 표준인 유니코드에 현대 한글 음절이 정확히 11,172자로 배정된 것도 이 계산 그대로다.
정해진 부품을 정해진 규칙으로 조립한다는 점에서 한글은 컴퓨터가 정보를 다루는 방식과 닮았다. 몇 개의 기본 단위와 결합 규칙만 알면 처음 보는 글자도 읽고 쓸 수 있다.
엄지 세 번이면 모든 모음
한글 모음은 하늘(ㆍ), 땅(ㅡ), 사람(ㅣ)이라는 세 기본 획에서 출발한다. ㅣ에 점을 더하면 ㅏ, ㅡ 위에 점을 얹으면 ㅗ가 되는 식이다. 휴대폰의 천지인 자판은 이 원리를 그대로 옮겨, 버튼 세 개만으로 모든 모음을 입력하게 했다.
자음도 마찬가지다. 기본 글자에 획을 더해 소리가 세지는 관계를 표시한다. ㄱ에 획을 더하면 ㅋ, ㄴ에서 ㄷ과 ㅌ이 나온다. 이 가획 원리 덕분에 작은 화면에서도 적은 키로 빠르게 쓸 수 있는 자판 설계가 가능했다.
500여 년 전 소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던 설계가, 결과적으로 좁은 화면과 엄지 입력이라는 현대의 조건에 잘 들어맞게 된 것이다.
디지털과 인공지능 속의 24개 글자
한글의 조합 규칙은 컴퓨터 안에서도 그대로 계산이 된다. 유니코드는 11,172개 현대 한글 음절을 초성·중성·받침 순서대로 빈틈없이 배열했다. 그래서 어떤 음절이든 간단한 산수만으로 자모로 분해하거나 다시 조립할 수 있다.
이 성질은 이미 일상 곳곳에 쓰이고 있다.
- 초성 검색: ‘ㄱㄴㄷ’만 입력해도 연락처나 노래 제목을 찾아주는 기능
- 자동완성·오타 교정: 음절을 자모 단위로 쪼개 비교하므로 한 획 차이의 오타도 잡아냄
- 음성 인식·합성: 글자와 소리의 대응이 규칙적이어서 발음 규칙을 체계화하기 쉬움 (단, 연음 등 소리 변화가 있어 완전한 1:1은 아님)
- 한국어 인공지능: 언어 모델이 한국어를 음절 또는 자모 단위로 나누어 학습·처리하는 방식이 연구·활용되고 있음
세종이 말한 ‘쉽게 익혀 날마다 편하게 쓰는’ 문자는, 사람뿐 아니라 기계에게도 배우기 쉬운 문자였던 셈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24개의 글자로 인공지능에게 질문하고, 인공지능은 같은 글자로 답한다.
예견인가, 설계의 힘인가
‘이 시대를 예견했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비유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내다본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표는 백성이 쉽게 배워 날마다 편히 쓰게 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택한 방법, 곧 소리의 원리를 분석하고 최소한의 기본 단위와 명확한 결합 규칙으로 문자를 짠 방식이 수백 년 뒤의 기술 환경과 맞아떨어졌다. 좋은 설계는 처음 의도한 범위를 넘어 오래 살아남는다는 사례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거나 ‘AI가 가장 잘 이해하는 문자’라는 식의 주장도 자주 보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공인된 비교 기준은 없다. 자부심은 사실 위에 설 때 더 단단하다.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에게
해외 대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은 영어 공부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 그런데 영어 철자와 발음의 관계를 익힐 때, 소리와 글자가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모국어 문자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의 자산이 된다. 소리를 단위로 쪼개고 규칙을 찾는 사고방식 자체가 언어 학습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24개의 글자가 보여주는 교훈은 단순하다. 적은 기본기라도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면 응용의 폭은 무한히 넓어진다. 수학이든 과학이든 외국어든, 공식을 외우기보다 구조를 이해하는 학생이 결국 더 멀리 간다.